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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철보신(明哲保身)

By 故事大全 , 3 September 2025

【출전】 『시경(詩經)·대아(大雅)·증민(烝民)』

【의미】 명철(明哲): 현명하고 지혜로움. 본래는 지혜로운 사람이 안전한 곳으로 나아가 위험을 피하며, 자신에게 위험을 초래할 수 있는 일에는 관여하지 않아 자신을 보전한다는 뜻이다. 오늘날에는 실수를 두려워하거나 자신의 이익이 손상되는 것을 걱정하여 원칙적인 문제에 대해 태도를 분명히 하지 않고 모호하게 대응하는 처세 태도를 가리킨다.

【역사 고사】

서주(西周) 선왕(宣王) 재위 기간, 조정에는 윤길보(尹吉甫)와 중산보(仲山甫)라는 두 명의 신하가 있었다. 이들은 주 선왕을 보좌하며 큰 공을 세웠다. 윤길보는 이름이 갑(甲)이고, '윤(尹)'은 관직명이다. 그는 북서쪽의 흠족(狁族)의 침공을 물리친 군사적 공로를 세웠으며, 성주(成周, 지금의 허난성 낙양 동쪽) 일대에서 남회이(南淮夷) 등 여러 부족의 조공을 거두는 임무도 수행한 바 있다. 중산보는 번(樊, 지금의 산시성 안남)에 봉해졌기 때문에 번중(樊仲), 번목중(樊穆仲)이라고도 불렸다. 중산보는 학식이 풍부할 뿐 아니라 직언(直諫)을 서슴지 않아, 조정의 신하들이 모두 그를 존경하였다.

당시 노(魯)나라 노무공(魯武公)에게는 두 아들이 있었는데, 장남은 괵(括), 차남은 희(戲)였다. 주 선왕은 일시적인 기분에 따라 무리하게 희를 노나라의 태자로 삼기로 결정했다. 이렇게 장남을 버리고 차남을 세우는 방식은 내부의 혼란을 초래하기 쉬웠다. 중산보가 이를 간절히 만류했지만, 주 선왕은 듣지 않고 희를 태자로 삼는 것을 고집했다. 이후 희가 즉위하여 노의공(魯懿公)이 되었으나, 노나라 백성들은 모두 분노하여 원망했고, 곧 노의공은 암살당하고 말았다.

중국 최초의 형법을 제정한 주목왕(周穆王)은 아홉 군대를 거느리고 초(楚)나라를 토벌한 후, 다시 서쪽으로 소수민족 쿤융족(犬戎)을 정벌하여 포로로 잡은 소수민족 부족들을 태원(太原) 지역으로 이주시켰다. '국인의 난(國人暴動)' 이후 즉위한 주 선왕은 백성들이 휴식을 취하게 해야 한다는 것을 알지 못한 채, 계속해서 전쟁을 일으켰다. 그는 윤길보에게 명령하여 쿤융족의 침공을 물리치고 태원 지역으로 반격하여, 태원 지역을 주 왕조의 영토에 편입시켰다. 주 선왕은 서북쪽 여러 부족의 침입을 방어하기 위해, 윤길보에게 제(齊) 땅에 성을 쌓도록 명령하기도 했는데,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가장 오래된 평요고성(平遙古城)이 윤길보가 쌓은 것이다.

이 무렵, 윤길보는 중산보에게 시 한 편을 지어 보내며, 중산보의 덕행과 재능을 칭찬하고, 주 선왕이 현명하게 유능한 인재를 등용하여 주나라를 중흥시켰음을 찬양하였다. 이 시가 바로 『시경·대아』의 「증민(烝民)」인데, 시에는 "숙숙왕명(肅肅王命), 중산보장지(仲山甫將之). 방국약부(邦國若否), 중산보명지(仲山甫明之). 기명차철(既明且哲), 이보기신(以保其身). 숙야비해(夙夜匪解), 이사일인(以事一人)"이라고 쓰여 있다. 이는 "천자의 명령은 매우 엄숙하고, 중산보가 이를 받들어 나아간다. 나라의 형편이 좋고 나쁨을, 중산보는 분명히 꿰뚫어 본다. 지혜롭고 현명하여, 이로써 자신을 보전한다. 밤낮으로 게으름을 피우지 않으며, 오직 한 분 임금을 섬긴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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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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