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기 동오(東吳)의 명장 육항(陸抗)은 스무 살에 건무교위(建武校尉)로 임명되어 아버지 육손(陸遜)이 남긴 5천 명의 부하들을 이끌게 되었다. 264년, 손호(孫皓)가 동오의 국군이 되었을 때, 38세의 육항은 진군대장군(鎮軍大將軍)을 맡았다. 당시 동오의 조정은 매우 부패했다. 손호는 음탕하고 잔혹하여 후궁의 궁녀만 수천 명에 달했으며 민간에서 약탈을 일삼았고, 얼굴 껍질을 벗기거나 눈을 뚫는 등 가혹한 형벌로 마음대로 사람을 죽였다. 육항은 손호의 이러한 행태에 매우 불만을 품고 여러 차례 상소를 올려, 밖으로는 국방을 강화하고 안으로는 정치를 개선하여 국력을 강화할 것을 간언하였다. 그는 한 번의 상소에서 현재 시급히 해야 할 일을 무려 16가지나 열거하기도 했다. 그러나 손호는 그의 제안을 일체 받아들이지 않았다.
272년, 서릉(西陵)을 지키던 오 장수 보찬(步闡)이 진(晉)나라에 항복하였다. 육항이 이를 알게 되자 즉시 군대를 이끌고 보찬을 토벌하러 갔다. 그는 진군이 반드시 보찬을 구원하러 올 것임을 알고, 서릉 외곽에 견고한 담장을 쌓도록 군민들에게 명령하였다. 오 장수들이 여러 차례 서릉을 공격하자고 요구했지만, 육항은 늘 허락하지 않았다. 공사가 마무리된 후, 진군이 서릉에 도착하여 보찬을 구원하려 하자, 육항은 군대를 이끌고 원군이 온 진군을 격퇴시키고, 다시 서릉에 맹공을 가하여 금세 성안으로 진입하여 반란 장수 보찬을 처형하였다. 당시 진나라의 거기장군(車騎將軍) 양호(羊祜)가 상양(襄陽)을 지키고 있었다.
양호는 육항이 공격과 수비 모두 능하다는 것을 보고, 동오를 무너뜨리기가 쉽지 않음을 깨달았다. 따라서 동오에 대해 화해 정책을 펼쳤다. 부하들이 동오의 아이들을 납치하면 돌려보내게 했고, 군대가 동오 국경에 이르러 동오의 곡식을 수확하면 비단과 천을 보내 보상했으며, 사냥한 짐승이 이미 오나라 사람에게 상처를 입은 것이면 오나라에 돌려주었다. 육항은 양호의 의도를 이해하고, 진나라에 대해서도 같은 태도를 취했다. 두 사람은 자주 사신을 오가며 서로 우호를 표시했다. 그래서 오나라와 진나라의 일부 국경 지역에서는 일시적으로 화목한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손호가 국경에서의 화해 소식을 듣고 매우 불쾌하게 여겨 사람을 보내 육항을 꾸짖었다. 육항이 답하기를, "한 마을이나 현이라도 신의가 없어선 안 되는데, 하물며 대국이겠는가! 제가 이렇게 하지 않는다면 오히려 양호의 위덕이 높음을 보여줄 뿐, 그에게는 아무런 해도 끼치지 못합니다."라고 하였다. 손호는 듣고는 말문이 막혔지만, 여전히 진나라를 공격하려는 뜻을 품고 있었다.
육항은 군대가 끊임없이 출동하여 백성들이 지쳐 쓰러질 지경에 이르자, 손호에게 상소를 올려 말했다. "지금 조정은 부국강병을 도모하지 않고, 농업 생산을 다그치고 곡식을 비축하며, 유능한 인재가 능력을 발휘하게 하고, 각급 관청이 직무를 태만히 하지 않도록 하며, 승진 제도를 엄격히 해 백관을 격려하고, 신중하게 형벌을 집행해 백성을 경계시키며, 도덕으로 관리들을 가르치고 인의로 백성을 위로하는 일을 하지 않고, 오히려 장수들이 명성을 추구하도록 내버려 두며, 전 군력을 동원해 전쟁을 멈추지 않고 계속하여, 소모되는 자금은 수만에 달하고, 병사들은 지쳐 쓰러질 지경입니다. 이렇게 해서 적은 약화되지 않고 오히려 우리 스스로 병에 걸린 것과 같습니다." 육항은 또한 심각하게 지적하여, 오나라와 진나라의 국력이 서로 다르므로, 비록 지금 군대를 보내 승리한다 하더라도 얻는 것보다 잃는 것이 더 크다고 하였다. 따라서 전쟁을 중단하고 국력을 비축하여 때를 기다려야 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손호는 육항의 이러한 충성스러운 충고를 일체 듣지 않았다. 이후 육항이 죽고 나자, 진군이 동오를 토벌하여 양자강을 따라 하류로 쳐내오니, 마치 대나무를 꺾어내듯 하여, 동오 국가는 마침내 진나라에게 멸망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