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충지(429-500)의 할아버지는 조창으로, 송나라 시절 궁정 건축을 관리하는 관직을 맡았다. 조충지는 이러한 가정에서 자라 어릴 때부터 많은 책을 읽었으며, 사람들은 그를 학식이 풍부한 청년이라고 칭찬했다. 그는 특히 수학 연구를 좋아했고, 천문력법(天文曆法) 연구에도 관심이 많아 태양과 별들의 운행 상태를 끊임없이 관측하며 상세한 기록을 남겼다.
송 효무제가 그의 명성을 듣고 전문 학술 연구 기관인 화림학성(華林學省)에 근무하도록 임명했다. 조충지는 벼슬 자체에는 관심이 없었지만, 이곳에서는 수학과 천문학 연구에 더욱 몰두할 수 있었다.
중국 역대에는 천문을 연구하는 관리들이 있었으며, 천문 관측 결과를 바탕으로 역법(曆法)을 제정해왔다. 송나라 시대에는 역법이 이미 큰 발전을 이루었으나, 조충지는 이를 아직도 정확하지 않다고 여겼다. 그는 오랜 기간 동안의 관측 결과를 바탕으로 새로운 역법인 '대명역(大明曆)'을 창안했다('대명'은 송 효무제의 연호). 이 역법이 측정한 회귀년(回歸年), 즉 두 번의 동지 사이의 일수는 현대 과학 측정치와 겨우 50초 차이밖에 나지 않았고, 달이 지구를 한 바퀴 도는 데 걸리는 일수는 현대 과학 측정치와 1초 미만의 차이만 있었으므로 그 정밀도를 알 수 있다.
서기 462년, 조충지는 송 효무제에게 새 역법을 선포해 줄 것을 요청했고, 효무제는 신하들을 소집하여 논의했다. 그때 황제의 총애를 받던 신하 다이파싱(戴法興)이 나서서 반대하며, 조충지가 고대 역법을 마음대로 변경한 것은 전통을 어기는 행위라고 주장했다. 조충지는 당장 자신의 연구 데이터로 다이파싱을 반박했다. 다이파싱은 황제의 총애를 등에 업고 횡포하게 말했다. "역법은 옛사람들이 정한 것이니 후손들이 함부로 바꾸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조충지는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엄숙히 말했다. "당신이 사실에 기초한 근거가 있다면 내놓고 토론하면 된다. 허튼소리로 사람을 위협하지 말라." 송 효무제는 다이파싱을 돕기 위해 역법에 통달한 여러 사람을 불러 조충지와 토론하게 했으나, 모두 조충지에게 하나씩 패배하고 말았다. 하지만 송 효무제는 결국 새 역법을 공포하지 않았다. 조충지가 죽은 지 10년이 지난 후에야 그가 창안한 대명역이 비로소 시행되었다.
당시 사회는 매우 혼란스럽고 불안정했음에도 불구하고, 조충지는 끊임없이 과학 연구에 매진했다. 그의 더 큰 성과는 수학 분야에 있었다. 그는 고대 수학 저서인 『구장산술(九章算術)』에 주석을 달았으며, 또 『추술(綴術)』이라는 책을 집필했다. 그의 가장 뛰어난 공헌은 매우 정밀한 원주율 값을 구한 것이다. 오랜 기간의 고된 연구 끝에 그는 원주율이 3.1415926과 3.1415927 사이에 있다는 것을 계산해냈으며, 세계 최초로 원주율을 소수점 이하 7자리 이상까지 계산한 과학자가 되었다.
조충지는 과학 발명 면에서도 다재다능했다. 그는 차량이 어떤 방향으로 돌아도车上(차 위)의 동인상(銅人像)이 항상 남쪽을 가리키는 '남지차(指南車)'를 만들었고, 또 '천리선(千里船)'을 만들어 오늘날 난징시의 남서쪽에 위치한 신정강(新亭江)에서 시운전을 했으며, 하루에 백 리 이상을 항해할 수 있었다. 또한 수력을 이용해 돌로 만든 물레방아를 돌려 쌀을 찧고 곡물을 빻는 '수퇴마(水碓磨)'라는 장치도 만들었다.
조충지의 말년에, 송나라 금위군을 장악했던 소도성(蕭道成)이 송나라를 멸망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