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삼강은 1913년 10월 16일 저장성 소흥에서 태어났다. 그는 중국 원자력 사업의 주요 창시자로, '중국 원자력 과학의 아버지', '중국 두 개의 폭탄과 한 개의 인공위성의 아버지'라고 불린다.
전삼강의 아버지 전현동은 근대 중국의 유명한 언어문자학자였다. 전삼강은 어릴 때 아버지를 따라 베이징에서 살았으며, 근대 일류 교육가인 채원배 선생이 교장으로 있던 공덕중학교에 다녔다. 그는 풍부한 문화 기초 지식과 광범위한 자연과학 상식을 갖추고 있었다. 젊은 시절 해외 유학을 떠나 1940년 프랑스 국립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이후 멈추지 않고 연구를 계속하며 큐리 부부의 제2세대인 조리오-큐리 부부의 조수로 활동했다. 곧 같은 분야에서 이상이 맞는 재능 있는 여성 하택혜와 결혼하여 함께 조리오 교수 밑에서 공부했다. 부부는 공동으로 협력하여 우라늄 핵 삼중분열 연구에서 돌파구를 마련했으며, 이 성과를 지도교수가 자랑스럽게 세계 과학계에 소개했다. 많은 국가의 학술지들이 이 감격적인 소식을 보도하며 "중국의 큐리 부부가 원자핵의 새로운 분열법을 발견했다"고 칭찬했다. 같은 해 프랑스 과학원은 전삼강 부부에게 물리학상을 수여했다.
1948년 여름, 부부는 애국심을 안고 자신들을 낳아준 조국으로 돌아와 나라의 발전을 위해 헌신하기로 결심했다. 1949년 베이징이 막 평화적으로 해방된 후, 극도로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정부는 전삼강에게 5만 달러를 지원해 프랑스에서 열리는 세계평화대회에 참석하는 기회를 이용하여 원자력 관련 기기와 자료를 구입하게 하여 원자력 개발 및 활용을 위한 준비를 하도록 했다. 전삼강은 감격에 겨워 눈물을 흘렸으며, 비로소 자신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자리가 생겼음을 깊이 느꼈고, 중국 과학기술의 봄이 다가오고 있음을 실감했다.
신중국이 탄생하자마자 전삼강은 온몸을 던져 원자력 사업의 기반을 다졌다. 중국과학원 근대물리연구소에서 부소장, 소장으로서 우리나라 핵무력 발전을 위한 전략을 수립하고, 핵사업 발전 계획을 세우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는 소련의 원조로 건설된 원자로 프로젝트에도 직접 참여하여 우리国情에 적합한 합리적인 제안들을 내놓았다. 또한 그는 아내 하택혜와 덩자셴 등 훌륭한 인재들을 포함한 수많은 진정한 실력자인 핵과학자들을 적극적으로 영입하여, 핵무기 개발의 각 단계에서 리더십을 발휘하게 하고 연구의 주도권을 확보하도록 했다.
1960년 중국은 자체 노력으로 원자폭탄을 개발하기로 결정하였고, 당시 전삼강은 이미 제2기계공업부 부부장을 겸임하고 있었다. 그는 중국 원자폭탄 개발의 기술총책임자이자 총디자이너로서, 모든 설계를 세심하게 수행하고 품질 관리를 철저히 하며 사소한 오류나 미세한 부분도 결코 놓치지 않았다. 또한 과거 조리오-큐리 부부가 자신과 하택혜를 양성했던 것처럼, 온 마음을 다해 차세대 과학 지도자를 양성했다. 이러한 심안 있는 전략적 접근은 '두 개의 폭탄과 한 개의 인공위성' 개발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여 개발 품질을 보장하고 속도를 가속화시켰으며, 중국이 세계 핵 강국의 반열에 올라서는 데 인재를 양성하고 든든한 기반을 마련해주었다.
전삼강은 말년에 병이 많고 정신력도 떨어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국과학기술협회 부회장, 중국물리학회 이사장, 중국핵학회 명예이사장 등의 직책을 계속 맡았다.
그는 병상에서도 조국의 핵사업 발전을 잊지 않았으며, 핵기술을 민간 분야에 신속하고 충실하게 적용해야 한다고 여러 차례 강조했고, 핵에너지 사용의 안전성과 신뢰성을 확보하여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1992년 6월 28일 전삼강은 병으로 세상을 떠나 79세를 살았다. 그해 국경절을 앞두어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 국무원, 중앙군사위원회는 순금 515그램으로 제작된 '두 개의 폭탄과 한 개의 인공위성 공훈장'을 전삼강에게 추서하여 이 과학 거장의 위대한 공헌을 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