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30년(금 천회 8년, 남송 건염 4년) 9월, 금군이 산시(陝西) 지역을 점령하기 위해 부평(지금의 산시성 부평 북부) 지역에서 송군의 반격을 격퇴한 전투이다.
천회 8년(1130년) 7월, 금 태종 완안성(完顏晟)은 완안종벽(完顏宗弼)이 강남으로 남하했다가 실패하고, 완안누실(完顏婁室)이 산시에서의 공격이 좌절된 것을 보고, 좌부원수 완안종한(完顏宗翰)의 건의를 받아들여 송나라 공격의 주요 방향을 강남 절강 지역에서 산시 지역으로 전환하기로 결정하였다. 우부원수 완안종보(完顏宗輔)를 산시 지역의 주요 사령관으로 임명하고, 동시에 완안종벽의 군대를 육합(지금의 장쑤성 소속)에서 서쪽으로 낙양(지금의 허난성 소속)으로 급파하여 병력을 집결시키고, 먼저 산시를 평정한 후 사천으로 진입할 것을 기도하였다.
금군의 추격을 피해 월주(지금의 저장성 소흥)로 도망간 남송 고종 조구(趙構)는 금군의 주공 방향이 여전히 강남 지역에 있다고 판단하고, 중서원사 겸 천천선무처치사(川陝宣撫處置使) 장준(張浚)에게 명하여 산시에서 공세를 개시해 회남 지역의 금군을 견제하도록 하였다. 장준 역시 수세에서 공세로 전환하고자 급했으며, 여러 군대를 정비하고 배치를 조정하며, 천천 지역의 5년 치 민간 세금을 미리 징수하여 많은 양의 식량, 군수품, 돈과 비단을 집중시켜 군수 물자를 마련하고, 먼저 동주(同州), 부주(鄜州), 연주(延州)(지금의 산시성 다리, 후현, 옌안)를 공격한 후 기회를 노려 금군과 결전을 벌이기로 결심하였다.
8월, 장준은 영흥군로 경략안무사 공무를 대리하는 오계(吳玠)에게 명하여 장안(지금의 시안)을 수복하도록 하였고, 환경로 경략사 조철(趙哲)에게는 부주, 연주 등을 수복하도록 하였다. 금 정부는 송군이 대규모 반격을 개시했다는 소식을 듣고, 즉시 종벽에게 낙양에서 정예병 2만 명을 이끌고 밤을 새워 요새로 급히 진군하라고 명령하였으며, 누실에게는 하동에서 수만의 병력을 거느리고 수덕군(지금의 산시성 수덕)에 진입하여 송군의 전진을 저지하도록 하였다. 장준은 금군의 주력이 산시로 진입한 것을 알고, 희하로 경략사 유석(劉錫), 경원로 경략사 유기(劉錡), 진봉로 경략사 손옥(孫渥), 그리고 조철과 오계를 포함한 오 개 부대 총 18만 명(일컬어 40만 명)을 명하여 관중 평야에 위치한 요주(지금의 요현)의 부평 지역으로 집결하도록 하였다. 장준 자신은 빈주(지금의 빈현)로 가 전투를 감독하며, 유석을 도통제로 삼아 여러 부대를 통제하고, 금군과 결전을 벌이려 하였다.
9월, 종보가 군대를 이끌고 부평 동쪽 하귀현에 진군하였고, 유석은 오 개 부대의 송군을 이끌고 부평 지역에 도착하여, 양군은 80여 리 떨어져 마주 보고 있었다. 송군은 갈대와 풀이 무성한 늪지를 장애물로 삼아 진영을 치고 진형을 갖추었으며, 각 부대에서 식량과 군수품을 운반하던 민간인들은 마차와 말로 경비를 서며 송군 진영 외곽에 진을 쳤다. 여러 장수들이 금군이 합류하기 전에 먼저 종벽의 군대를 공격할 것을 건의하였으나, 장준은 병력이 많다는 것을 믿고, 금군에게 전서를 보내 약속된 날짜에 결전을 벌이자고 하였다. 종보는 전서를 받은 후 응답하지 않고, 누실의 군대를 기다리기 위해 시간을 끌었다. 누실이 부평에 도착한 후, 송군은 병력상 우세하지만 진영이 견고하지 못하다는 것을 발견하고, 종보는 전투를 결정하였으나, 약속된 날짜에도 여전히 약한 척하며 출전하지 않았다. 장준은 금군이 겁을 먹고 싸우기를 꺼린다고 오해하고, 여러 부대를 독려하여 공격을 개시하였다. 오계는 송군이 고지를 점령하여 금군 기병의 활동을 막을 것을 건의하였으나, 유석 등은 병력이 많고 적이 적으며, 앞에 갈대 늪이 있어 금군 기병이 활동하기 어렵다고 판단하여 이 제안을 채택하지 않았다.
24일, 유석은 먼저 천여 명을 파견하여 금군에게 시범 공격을 개시하였다. 누실은 지형의 이점을 이용해 매복을 설치하고, 경병을 보내 송군을 매복 지점으로 유인한 후 앞뒤에서 협공하여 거의 전멸시켰다. 이후 누실은 용장 완안절합(完顏折合)에게 기병 3,000명을 이끌고 흙 자루를 이용해 갈대 늪 위에 길을 만들고, 진흙을 넘어 송군 외곽의 민간인 소규모 진영을 직접 기습하도록 명령하였다. 민간인들이 송군 진영으로 도망쳐 들어가자, 송군 여러 부대에 혼란이 일어났다. 종보는 이 틈을 타 누실의 군대를 우익으로, 종벽의 군대를 좌익으로 하여 공격을 개시하였다. 송군은 급히 맞서 싸웠으나, 통합 지휘를 상실하여 오 개 부대가 각개 전투를 벌였다. 유기는 먼저 경원로 송군을 이끌고 종벽의 군대를 맞서 포위하고, 많은 병사를 살상하고 포로로 잡았다. 금 장수 한상(韓常)은 화살에 눈을 맞았으나, 말을 타고 계속 사투를 벌이며 종벽과 함께 포위를 뚫고 나와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누실은 위급한 상황을 보고 우익 군대를 이끌고 환경로 조철의 군대를 강하게 공격하며, 친히 지휘하여 군세를 되살렸다. 그러나 송군 여러 부대가 서로 지원하지 못하여 조철의 군대는 고립되어 적을 당하지 못하고, 전장에서 임의로 떠나자 부하들이 줄지어 도망치기 시작하였다. 황혼 무렵, 금군은 전력을 다해 맹공을 퍼부었고, 송군은 대패하여 빈주로 후퇴하였으며, 버려진 군수품과 군장비는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다.
금군은 승세를 몰아 진격하여 산시 지역 대부분을 신속히 점령하였다. 송군은 진령 북쪽 산기슭의 화상원(지금의 보지 서남부), 그리고 계주, 성주(지금의 감숙성 우도 동남부, 청현) 등지로 후퇴하여, 요새를 이용해 방어를 구축하고 금군과 대치하였다.
이 전투는 송-금 전쟁에서 대규모로 벌어진 한 차례의 결전이었다. 남송은 성급하게 중병을 집결하고, 서둘러 반격을 개시하였으며, 전투 지휘에서 병력의 우세를 믿고 적을 경시하였고, 부대 간 협조가 없어 대패하였다. 반면 금군은 시기 적절하게 배치를 조정하고 병력을 집중하여, 예상 밖의 전술로 일거에 승리를 거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