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한창리전집・조주촌사사상표》(《韩昌黎全集・潮洲村史谢上表》) 이때, 소위 천년에 한 번 만나기 어려운 좋은 기회라 할 것이다.
【해의】:"재(载)"는 해를 의미하고, "봉(逢)"은 만나다를 의미한다. 천 년 동안도 쉽게 만나지 못한다는 뜻으로, 기회가 극도로 드물다는 것을 형용한다.
이야기:당나라의 유명한 문학가 한유(韩愈)는 어렸을 때 부모를 잃고 형수에게 길러졌다. 그는 꾸준히 자학하여 젊은 시절부터 책을 광범위하게 읽고 학문적으로 견고한 기초를 다졌다. 35세 때 경도(京城)에 갔고 국자감 박사(国子监博士)를 역임했으며, 나중에는 형부 시랑(刑部侍郎)으로 승진했다. 당시 불교가 성행했고, 당헌종(唐宪宗)도 불교를 매우 숭배했다. 그는 어떤 사원에 불교의 창시자 석가모니의 유골이 모셔져 있다는 소식을 듣고, 큰 규모로 사람을 동원하여 그 유골을 궁궐에 모셔다 드릴 준비를 하고 있었다. 한유는 이 일에 대해 매우 반감을 느끼고 《간영불골표》(《谏迎佛骨表》)를 써 반대했다. 그중에서 불교가 중국에 전래된 이후, 제왕들의 재위 기간이 모두 길지 않았고, 불상을 빌어 보호를 구하는 사람은 결국 비참한 결과를 맞이한다는 내용을 언급했다. 당헌종이 이 표를 보고 매우 분노했는데, 그는 한유가 단순히 자신과 대적하는 것이 아니라 역사를 빌어 자신의 수명이 길지 않을 것이라고 암시하는 것으로 생각했다. 이 때문에 한유를 처형하려 했으나, 재상(宰相)이 그를 위해 말을 걸어주어 처벌을 축소하여 초주(潮州) 자사(刺史)로 강등시키는 데 그쳤다. 당나라 중기에는 중앙 통치 권력이 날로 약해졌다. 헌종이 집권한 후, 이전 왕조의 여러 폐단을 개혁했기 때문에 중앙 정권의 통치력이 어느 정도 강화되었다. 초주로 강등된 한유는 이러한 상황을 감안하여 다시 헌종에게 《초주자사사상표》(《潮州刺史谢上表》)를 올려 헌종을 극력 찬양했으며, 이를 통해 다시 신임을 얻어 조정으로 돌아가고자 했다. 이 표에서 한유는 헌종을 세상을 뒤집는 중흥의 주인(中兴之主)으로 경배했고, 헌종이 태산(泰山)에서 '봉산선사(封禅)'할 것을 제안했다. 봉산선사는 하늘과 땅을 제사하는 큰 의식을 말한다. 옛 사람들은 오악(五岳) 중에서 태산이 가장 높다고 생각했는데, 봉우리까지 올라가 제단을 쌓아 하늘을 제사하는 것을 '봉(封)'이라고 하고, 산남량부산(山甫梁父山)에 기반을 마련하여 땅을 제사하는 것을 '선(禅)'이라고 했다. 역사상 유명한 진시황(秦始皇)과 한무제(汉武帝)도 이런 의식을 거행한 바 있다. 한유가 이렇게 제안한 것은 헌종을 뛰어난 공헌을 한 제왕으로 보는 의도였다. 한유는 또 이 표에서 은근히 헌종이 자신도 봉산선사의 성회에 참여하게 해주기를 바란다는 뜻을 표현했으며, 만약 자신이 이 천년难得의 성회에 참여하지 못한다면 평생의 아쉬움으로 남을 것이라고 말했다. 나중에 헌종은 한유를 경도로 돌려보내 이부 시랑(吏部侍郎)을 역임하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