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원전 91년, 잔혹한 관리 강충과 사심을 품은 이씨 가문이 꾸민 '오고의 화(巫蠱之禍)'가 45세의 태자 유거에게 다가왔다. 본래 온화하고 관대하며 음모와 권력 다툼에 서툰 유거는 금세 궁지에 몰려 그 해 8월 신해일에 자결하고 말았다. (이로써 성실한 사람은 정치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유거의 두 아들도 아버지와 함께 죽음을 맞이했다. 유거의 어머니 위황후 자부는 손자와 자손들보다도 더 일찍 세상을 떠났다. 7월 경인일에 그녀는 자손들을 앞서 원한 가득한 채 세상을 떠났다.
유거와 함께 죽은 무제 황손 두 명 중 한 명은 유진이라는 인물이었는데, 그는 훗날 한 선제 유순의 아버지였다. 그의 어린 시절 이름은 '사황손(史皇孫)'이었다.
—한 왕조에서 태자의 첩들은 세 등급으로 나뉘었다. 정실 부인은 태자비, 자식을 낳은 첩은 양제, 자식이 없는 첩은 유자였다. 유진의 친어머니는 양제였고, 노나라 사람이며 사(史)씨였다. 사양제는 남편과 아들을 잃는 천재일우의 재난에서 살아남지 못하고 죽었다. 그녀 앞뒤로 거의 모든 위태자부의 여성 가족들도 자결했다. 그 중에는 유순의 친어머니도 포함되어 있었다.
부모, 조부모, 증조모까지 모두 비명횡사한 그때, 황족의 증손 유순은 겨우 몇 달 된 아기였다. 얼마 전 그가 세상에 태어났을 때, 무제 유철과 황후 위자부를 비롯해 태자부의 관리와 하인들까지 얼마나 기뻐했는가? 그러나 눈 깜짝할 사이에 세상은 완전히 뒤집어지고 말았다.
가산이 산산조각 난 그때, 유순은 갓난아기일 뿐이었다. 아무런 저항도 할 수 없는 무력한 존재에 불과했다. 그러나 그는 무제 유철의 친증손자로서 고귀한 혈통을 지녔기 때문에 무제는 그 역시 감옥에 가둬야 한다고 명령했다. —흠, 왠지 이상하게 들린다.
어머니가 없는데, 이 젖먹이가 어떻게 살아갈 수 있었을까? 다행히 그는 수도 장안성 밖의 감옥에 갇혀 있었고, 친절한 감옥 관리 병길을 만나게 되었다. 병길은 이렇게 무고한 아기가 억울한 죽음을 당하는 것을 참을 수 없어, 두 명의 여성 죄수 조정경과 호조를 찾아 이 아이를 젖을 먹여 키우게 했다.
다행히 장안성 밖이었지, 장안성 안이었다면 유순은 아마도 '황제의 뜻을 읽는 데 능숙한' 수도의 아첨꾼 관리들에게 벌써 죽임을 당했을지도 모른다.
감옥 환경은 매우 열악했고, 영양과 의료도 극도로 부족했다. 그러나 고귀한 가문에서 태어난 유순은 놀라울 정도로 강인한 생명력을 지녔고, 감옥에서 자라났다.
유순이 다섯 살이 되던 해, 한 별점가(星象家)가 그의 증조할아버지 무제 유철에게 보고했다. "장안성 주변 군현의 감옥 위에 천자의 기운을 지닌 특이한 빛이 번쩍이며 밤하늘을 뚫고 올라갑니다. 폐하께서는 반드시 일찍 대비하셔야 합니다."
유철은 즉시 경계를 늦추지 않고, 감옥에 수감된 모든 사람을 죄의 유무, 죄의 경중을 막론하고 전원 사형에 처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 명령이 병길이 관리하는 곳에 도달했을 때, 병길은 죽음을 각오하고 단호하게 저항했다.
병길은 말했다. "죄수이든 일반 백성이든 함부로 사형을 선고할 수 없는데, 하물며 이 감옥에는 황제의 친증손자가 갇혀 있습니다!"
그의 논리적인 항의는 곧 유철의 귀에 닿았다. 살기에 빠져 있던 노인은 '황족의 증손'이라는 세 글자를 듣자마자 마치 머리 위에 찬물을 뒤집어쓴 듯했고, 가득 찬 살의(殺意)는 어쩐지 사그라들어, 한숨을 쉬며 말했다. "이것은 아마도 하늘이 병길의 입을 빌려 나를 경고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이에 따라 살인 명령을 철회할 뿐 아니라, 전국에 대한 대사면(大赦)의 칙령까지 내렸다.
고결하고 정의로운 병길 덕분에, 혈우(血雨)와 폭풍(腥風) 속에서 떨고 있던 한나라 백성들은 마침내 안도의 한숨을 쉴 수 있었다.
사면령이 내려진 바로 그날, 다섯 살의 유순은 비틀비틀 걷는 인파와 함께 감옥을 나섰고, 그의 옥중 생활은 끝이 났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다섯 살에 불과한 아이였다. 그의 증조할아버지는 이미 숙조부 유불릉을 태자로 세우기로 결정했고, 따라서 장남의 후손에게는 의심을 품을 수밖에 없어, 그를 궁중으로 데려올 수 없었다. 정치적 다툼에서는 혈육의 정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게다가 유순의 친어머니인 유진의 첩 왕옹수는 이미 오래전에 죽어 시신조차 거둬줄 사람이 없었고, 더욱이 그녀가 아들을 양육할 리 만무했다.
문제는 이제 이 버림받은 아이가 어디로 가야 할까 하는 것이었다.
다시 한번, 유순의 목숨을 두 번이나 구한 평범한 관리 병길이었다. 그는 유순을 다시 자신의 수레에 태워 노나라에 있는 유순의 조모 사양제의 가문에 맡겨 살게 했다. 사양제의 어머니 정군은 이 불쌍한 아이를 매우 아껴 주었고, 나이가 많고 몸이 약함에도 불구하고 직접 그의 생활을 돌보았다.
사가(史家)에 부담을 주지 않기 위해, 그리고 유순이 자신의 신분과 지위를 회복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병길은 유순의 사면 소식을 즉시 옥정(掖庭)에 보고했다. 이로써 유순의 이름은 유씨 종친의 가계도에 등재되었고, 생활비는 전적으로 궁중에서 제공되었다. —바로 황족으로서 공식적으로 인정받았기 때문에, 좋은 교육을 받을 기회를 얻을 수 있었고, 12년 후에는 황제의 자리에 오를 가능성도 갖게 되었다.
병길은 눈물汪汪하고 운명이 고달팠던 이 아이에게 늘 연민을 품고 잊지 않았다.
기원전 74년, 소자 유불릉이 자식 없이 일찍 세상을 떠난 후, 이미 광록대부(光祿大夫)로 승진한 병길은 집정 대장군 화광에게 주서(奏書)를 제출했다. 그는 이 주서에서 화광에게 진지하게 제안했다. 소제의 일찍 세상을 떠남으로써, 유씨 왕족의 왕후와 제후들이 많지만, 탁월한 학식과 인품을 지닌 자도 없고, 황제 자리를 꼭 계승해야 할 가까운 혈통도 없다. 오직 무제 유철의 직계 장남의 증손 유순만이 혈통이 가깝고, 민간에서 자라 인품과 학식이 훌륭하니, 화광이 유순을 불러 만나보아 인상이 확실히 좋다면, 유순을 새 황제로 세우는 것을 제안한다.
이렇게 해서 병길의 사랑과 보살핌 속에서, 어리둥절한 유순은 어쩌다 보니 대한 천자의 보좌에 오르게 되었다. 그 해 그는 열일곱 살이었다.
병길은 진정한 고결한 군자였다. 그는 어린 유순과 수천 명의 평범한 백성들의 목숨을 여러 차례 위험을 무릅쓰고 구했을 뿐 아니라, 유순을 황제로 추대한 후에도 자신의 엄청난 공로를 절대 입에 올리지 않았다. 오랜 시간이 지난 후 유순이 직접 이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조차, 병길은 여전히 공로를 다른 사람들에게 양보했다.
새로 즉위한 유순은 겨우 열일곱, 여덟 살의 나이였지만, 이미 민간에서 결혼을 했고, 그의 원처 이름은 허평군이었다. 이 어린 부부는 이미 한 명의 아들을 두었는데, 그가 바로 훗날 왕소군을 국경 밖으로 보낸 한 원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