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원나라 중기 무렵, 미나모토노 요리토모라는 무인이 가마쿠라에서 막부를 개창하였다. 이로부터 일본에서는 천황 조정 세력과 막부 장군 세력이 대립하는 상황이 나타나게 되었다. 천황의 권위는 급속히 쇠퇴하였고, 국가의 중요한 사무는 실질적으로 모두 막부가 결정하게 되었다. 장장 700년에 걸쳐 천황은 거의 막부의 꼭두각시에 불과했다.
그러나 이 시기에 몇몇 천황들은 막부의 간섭을 배제하고 천황의 권위를 회복하려는 노력을 기울였다. 제96대 천황인 고다이고 천황이 바로 그 중 한 사람이다.
고다이고 천황은 1288년에 태어나 21세에 황태자가 되었고, 31세에야 비로소 천황의 자리에 올랐다. 오랜 기간 동안 일본의 천황들은 대체로 10세 전후에 즉위하고 20세 전후에 퇴위하였다. 대부분의 천황들은 재위 시 나이가 어려서 제대로 된 업적을 이루기 어려웠다. 고다이고 천황은 즉위 전에 조정 관료로 재직하였고, 황태자로 책봉된 10년 동안 국가를 다스리는 많은 경험을 쌓았으며, 주변에 학식과 능력을 갖춘 인재들을 모아두었기 때문에 막부에 대항할 수 있는 좋은 기반을 마련하였다. 그는 정권을 장악한 후 덕과 재능을 겸비한 인물을 등용하고, 과거의 나쁜 정책과 법률을 폐지하며 청렴하고 공정한 정치를 실시하였다. 또한 밤낮을 가리지 않고 백성들의 호소를 경청하며 백성들의 고충을 해결해주었고, 조정 내외와 민간 백성들 모두 고다이고 천황을 극찬하였다.
그러나 고다이고 천황은 마음속으로 분명히 알고 있었다. 진정으로 국가를 잘 다스리기 위해서는 우선 막부를 무너뜨려야 한다는 것을.
당시의 가마쿠라 막부는 창시자 미나모토노 요리토모 사후, 실권이 빠르게 호조 씨 일가에게 넘어갔다. 가마쿠라 막부의 집권자 호조 타카토키는 정치에 관심을 두지 않고 매일 사치스럽게 놀며 술을 마시고 개 싸움을 즐겼는데, 사람들은 그를 '개 장군'이라 부르며, 이로 인해 정무는 혼란에 빠지고 하급 무사들의 불만은 날로 커졌으며, 상층 무사들조차 마음이 떠나가며 외로운 몸이 되어갔다. 고다이고 천황은 막부의 권위와 실력이 이미 상당히 쇠퇴하였고, 막부를 무너뜨릴 절호의 기회라 판단하고 적극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는 귀족, 승려, 무사들 중 막부에 반대하는 이들을 비밀리에 소집하여 시회(詩會)와 음악회를 여는 명목으로 막부 타도 계획을 논의하였다. 다른 사람들의 의심을 피하기 위해 참석자들은 회장에 들어가면 모자를 벗고, 승려들은 법의를 벗어두었으며, 탁자 위에는 술과 음식을 가득 놓아 마치 흥겹게 즐기는 것처럼 위장하였다. 이러한 위장 아래에서 점점 완벽해지는 행동 계획을 수립하였고, 각지의 반(反)막부 세력과 연락을 취해 막부와의 전쟁을 준비하였다. 불행하게도, 무사 도키 요시하루라는 인물이 표면적으로는 천황의 계획에 찬성했지만 막부를 이길 자신이 없어 몰래 막부에 밀고하였다. 막부는 이 소식을 접하고 크게 놀라 즉시 사신을 교토에 보내 고다이고 천황의 측근 대신인 히노 아사스에, 히노 도시카타 등을 체포하여 가마쿠라로 압송해 심문하였다. 고다이고 천황은 계획이 드러난 것을 알고 실력을 보존하기 위해 급히 사람을 가마쿠라에 보내 천황은 이 사건과 무관하며, 천황은 결코 막부에 반대할 생각이 없다고 선언하였다. 결과적으로 막부는 히노 아사스에만 유배시키는 것으로 마무리하였다. 그러나 당시 사람들은 여전히 이 사건을 '천황의 반란'이라고 불렀는데, 이는 당시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천황이 막부를 이끄는 것이 아니라 막부가 천황을 이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번 성공하지 못한 쿠데타를 계기로 막부와 천황 사이에는 서로 경계심이 높아졌다. 1326년, 황태자 방량친왕이 죽자 고다이고 천황은 자신의 아들을 황태자로 세우려 하였으나, 막부는 단호하게 량인친왕을 황태자로 세울 것을 주장하였다. 이 투쟁은 막부의 승리로 끝났다. 량인 황태자의 아버지는 아들이 빨리 즉위하기를 바라며 끊임없이 신령의 보호를 기도하였는데, 실질적으로는 고다이고 천황의 퇴위를 저주한 셈이었다. 고다이고 천황은 막부에 대한 원한이 더 깊어졌고, 막부를 무너뜨리려는 결심도 더욱 굳어졌다. 이번에는 그의 반막부 계획이 더욱 신중하고 완벽해졌다. 그는 자신의 아들인 존운친왕과 존승친왕을 차례로 불교 천태종의 주석(座主)으로 임명하여 사원 세력을 통제하였고, 직접 남도(奈良)를 방문하여 현지 세력과 정을 나누며 병변(兵變)을 꾀하였다. 동시에 승려 원관(園觀), 문관(文觀)과 측근 히노 도시카타 등을 소집하여 사원 무장 세력을 이용해 막부를 공격하는 계획의 세부 사항을 연구하였다. 그러나 1331년 4월, 천황이 신뢰하던 중신인 요시다 사다카타가 갑자기 막부에 밀고를 하였다. 막부는 신속히 원관, 문관, 히노 도시카타 등을 체포하였다. 막부는 천황을 직접 건드리지는 않았지만, 고다이고 천황은 이미 상황의 위험성을 깨달았다. 8월에 남장삼복(男裝三伏)으로 위장하고 천황의 지위를 상징하는 세 가지 신기(神器)를 가지고 남도 나라의 가사기사(笠置寺)로 도망갔으며, 가사기산(笠置山)을 근거지로 삼아 각지의 무사와 백성들을 불러 모아 막부에 반기를 들고 천황을 보호할 것을 호소하기로 결정하였다.
막부는 천황이 난을 일으킨 것을 알고 아시카가 다다후지 등에게 군대를 이끌고 천황을 토벌하도록 명령하였다. 아시카가 다다후지는 교토에 진입하여 량인 황태자를 광엄천황으로 책봉하였다. 이때 일본에는 남북 두 천황이 동시에 존재하게 되었는데, 하나는 교토에 있으면서도 천황의 지위를 상징하는 신기는 없었고, 하나는 신기를 가지고 있지만 가사기사로 망명해 있었다. 그러나 국내에는 고다이고 천황의 호소에 호응하여 막부에 반기를 들고 나선 이들이 많았다. 그 중 가장 먼저 참가했고 영향력이 가장 컸던 인물은 오사카 지역의 호족인 쿠스노키 마사시게였다.
쿠스노키 마사시게는 어릴 때부터 큰 포부를 품었고, 청년 시절에 이미 가문의 적을 물리치며 나중에는 실질적으로 오사카 지역을 장악하여 세력이 상당히 강대하였다. 고다이고 천황의 호소를 접한 쿠스노키 마사시게는 이것이 자신의 정치 무대에 등장할 좋은 기회라 생각하고 즉시 군대를 일으켜 호응하였으며, 직접 가사기산으로 달려가 천황에게 충성을 맹세하였다. 천황이 북조 씨를 무너뜨리기 위해 어떤 계책을 쓸 것인지 묻자, 그는 "천하를 통일하려면 무략과 지모가 필요합니다. 승패는 병가상사(兵家常事)로서 한두 번의 패배는 하찮은 일이니 마음에 두지 말아야 합니다. 제가 쿠스노키 마사시게가 죽지 않는 한, 반드시 천황을 보필하여 위대한 업적을 이루겠습니다!"라고 답했다.
가사기산으로 달려든 여러 장군들 중 쿠스노키 마사시게는 곧바로 천황의 중용을 받았다. 전해에 따르면 천황이 위기의 순간에 꾼 꿈에, 남쪽에 커다란 상록수 한 그루가 있고, 그 옆에 옥좌 하나가 놓여 있었으며, 좌우에는 신하들이 줄지어 섰고, 두 어린아이가 천황에게 "오늘날 천하에서 오직 그 옥좌만이 폐하께서 가장 편히 안식할 수 있는 곳입니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천황이 깨어난 후 꿈의 내용을 풀이해달라고 하자, 풀이한 사람은 "남쪽의 상록수는 '쿠스노키(楠木)'를 의미하며, 오직 쿠스노키라는 인물만이 폐하께서 의지할 수 있는 최고의 무사입니다"라고 말했다. 따라서 쿠스노키 마사시게가 도착하자마자 고다이고 천황의 측근이 되었다.
쿠스노키 마사시게가 가사기산에 도착했을 때, 산 위의 병력은 많지 않았고 전투력도 부족하였다. 쿠스노키 마사시게는 가사기산을 오래 지키기 어렵다고 예상하고, 천황을 알현한 후 즉시 자신의 근거지인 오사카로 돌아가 급히 치하야성을 강화하여 가사기산이 함락된 후 천황을 치하야성으로 맞이할 준비를 하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가사기산은 실제로 막부군에게 함락되었다. 고다이고 천황은 급히 치하야성으로 도망갔지만, 길을 잃은 탓에 결국 막부군에게 생포되어 수도로 돌아와 연금되었다. 10일 후, 막부군은 치하야성을 포위하기 시작하였다. 당시 치하야성 내부의 쿠스노키 마사시게 병력은 고작 2~300명에 불과하였으나, 그는 병력의 열세를 무릅쓰고 다양한 전술을 동원하여 막부군과 격렬한 전투를 벌였다. 성 위에서 돌을 던져 적군을 공격하고, 긴 손잡이 숟가락으로 끓는 물을 적군 머리 위에 쏟아부으며, 심지어는 적군 진영에 오물을 쏟아부었다. 이러한 비정상적인 전법들로 인해 막부군은 큰 곤란을 겪었다. 막부군이 마침내 치하야성에 진입했을 때, 쿠스노키 마사시게와 존운친왕은 이미 교묘하게 고노산맥으로 탈출한 후였다.
고다이고 천황은 막부의 강력한 압박 아래 천황의 지위를 상징하는 세 가지 신기를 광엄천황에게 넘겨줄 수밖에 없었고, 1332년 3월에는 막부에 의해 오키 섬으로 유배되었으며, 다른 막부 타도의 핵심 인물들도 중한 처벌을 받았다. 겉으로 보기에는 고다이고 천황의 두 번째 막부 타도 운동은 또다시 실패한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국내에서 막부에 저항하려는 의지를 가진 사람들은 여전히 그에게 큰 기대를 걸고 있었다. 고다이고 천황이 오키 섬으로 유배되는 길에, 무사들이 그를 구출하려 시도하였으나 막부군의 경비가 삼엄하여 기회를 잡지 못하였다. 무사들은 천황이 묵었던 정원의 체리나무 줄기에 두 줄의 시를 새겼다. "천(天)은 공자(空)로 고건(勾踐)을 버리지 않으며, 때는 범려(范蠡)가 없는 것이 아니다." 중국 춘추 시대 범려가 오왕 부차를 물리치고 고건 왕을 도와 고난 끝에 나라를 되찾은 이야기를 빗대어 고다이고 천황에게 "천하에서 오직 당신만이 고건처럼 투쟁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말고, 지금 당신을 도와줄 수 있는 범려 같은 사람이 없지는 않다는 것을 알라!"고 전한 것이다. 천황이 이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매우 감동하였고, 막부와의 투쟁 의지는 더욱 굳세어졌다. 비록 외딴 섬에 처해 있었지만 외부와의 연락을 단절한 적이 없었으며, 반막부 활동도 결코 멈추지 않았다.
그와 동시에 쿠스노키 마사시게와 존운친왕은 고다이고 천황의 이름을 내세워 각지에서 활동하며 조용히 근거지를 확장하고 각지의 무사들에게 막부에 반기를 들도록 촉구하였다. 1년 이상의 비밀 활동을 거쳐 반막부 상황은 크게 호전되었고, 1332년에 쿠스노키 마사시게는 치하야성을 되찾았으며, 다음 해 1월에는 연이어 여러 차례의 대승리를 거두었다. 각지의 반막부 세력들이 줄지어 호응하며 막부 타도 운동의 첫 번째 고조를 형성하였다. 막부도 쿠스노키 마사시게를 가장 위험한 적으로 간주하고 세 개 부대로 군대를 파견하여 진압하였는데, 이른바 '백만 대군'이라 불렸지만 실제로는 약 2만여 명으로, 막부가 동원할 수 있는 최대 병력이었다. 또한 현상금을 내걸고 "누구든지 쿠스노키 마사시게를 죽이면 땅을 나누어 주고 왕을 봉해 주겠다"고 선포하였다. 쿠스노키 마사시게는 천여 명의 병력으로 적과 지략과 용맹을 겨루며 3개월 이상 버텼다. 쿠스노키 마사시게가 막부군의 주력을 끌어당긴 덕분에 각지의 반막부군은 기회를 틈타 교토와 가마쿠라를 공격하였으며, 고다이고 천황도 유배지 오키 섬에서 탈출하여 다시 전국에 칙령을 내려 모두가 막부를 토벌할 것을 호소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막부의 두 장수 아시카가 다다후지와 닛타 요시사다가 차례로 반기를 들며 고다이고 천황 편에 서서 막부를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5월 7일 아시카가 다다후지가 교토를 함락시키고, 22일 닛타 요시사다가 가마쿠라를 함락시켰으며, 일본을 장장 한 세기 반 동안 지배해온 가마쿠라 막부는 멸망하였다.
1333년 6월, 고다이고 천황은 다시 교토의 천황 자리에 복위하여 광엄천황을 폐위하였다. 그는 측근들에게 중국 역사를 참조하여 '어지러움을 바로잡고 올바름을 세운다'는 자신의 뜻을 표현할 수 있는 적절한 중국 연호를 선택하라고 명령하였다. 측근들은 '건무(建武)', '대무(大武)', '무공(武功)'이라는 세 개의 연호를 제안하였다. 고다이고 천황은 건무를 선택하였다. 이는 한나라 광무제 류슈가 왕망을 무너뜨리고 한나라 왕조를 중흥할 때 사용한 연호였다. 그는 마침내 오랫동안 품어온 꿈을 이루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