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송 경력 7년, 강남 지역은 끊임없이 비가 내렸다. 3월부터 9월까지 계속된 폭우로 논밭의 작물은颗粒无收(입에 넣을 곡식도 없을 정도로) 전멸했고, 피해를 본 현은 127개에 달했다. 쌀값은 연이어 오르기 시작했고, 10월이 되자 원래 석(石)당 400문이던 쌀값이 1500문까지 치솟았다. 백성들은 도저히 견딜 수 없는 고통 속에 빠졌다.
강남 각지의 관리들은 조정에 구호를 요청하면서 동시에 쌀값을 강력히 억제하고 투기상들을 단속했다. 쌀값을 올리는 자를 적발하면, 가벼운 경우는 재산 몰수와 함께 군대에 징용했고, 중한 경우는 현장에서 참수했다. 이런 천둥 같은 강경 수단 덕분에 강남 지역의 쌀값은 마침내 안정을 되찾아 석당 약 500문 선에서 유지되었다.
그러나 동남 해안가, 당시 인촨(鄞縣)이라 불리던 외진 작은 현(지금의 닝보)에서는 아주 특이한 현령이 등장했다. 그는 쌀값을 억제하지 않을 뿐 아니라, 공식 문서를 발부해 정부 명의로 강제적으로 규정했다. "인촨 현내 쌀값은 석당 3000문!"이라고.
이 대담한 현령이 바로 역사상 유명한 왕안석이었다.
일시적으로 닝보 지역은 민심이 요동쳤고, 특히 일반 백성들의 원성이 가장 심했다. 쌀값이 너무 비싸서 많은 가정이 온 가족이 죽음을 먹으며 연명할 수밖에 없었다. 쌀 상인들은 기뻐 날뛰었고, 큰 돈을 벌었다. 그들은 각자 알아서 왕안석에게 은전과 금은을 바쳤다. 이에 대해 왕안석은 거절하지 않고 모두 받아들였다. 가끔 외지 상인들이 금은을 바치는 것을 잊으면, 왕안석은 서리(師爺)를 보내 요구했다.
당시 항저우 지부(知府)였던 뤼샹고(呂向高)는 이 소식을 듣고 분노를 참지 못했다. 다만 왕가(王家)가 대대로 벼슬을 했고 실력이 강대하며, 왕안석 본인 역시 국내적으로 명성이 높은 문인 지도자이기 때문에 일단 처벌을 미룬 것이다. 뤼샹고는 속으로 생각했다. "닝보가 완전히 혼란에 빠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왕안석을 처단하자! 그래야 내가 현자를 시기하고 인재를 용납하지 못한다는 욕도 덜 수 있다."
그러나 뜻밖에도, 산시(陝西) 일대가 연이은 가뭄으로 인해 조정이 수년간 구호를 해왔기 때문에 국고는 이미 빈약한 상태였다. 이제 강남의 홍수 재해에 일시적으로 구호할 힘이 없었다. 다음 해 3월이 되자, 강남 시장에는 거의 쌀이 팔리지 않게 되었다. 블랙마켓에서는 쌀값이 석당 5000문까지 올랐지만, 흔히 '가격은 있지만 물건은 없다'는 상황이었다. 대량의 기아민들이 속출하기 시작했고, 많은 이들이 온 가족이 타지로 이주했다. 매일 수많은 사람들이 굶어 죽었다. 예전에 풍경이 그림 같았던 강남은 일시에 애곡성이 울려퍼지고 처량한 광경이 펼쳐졌다.
이와 극명한 대조를 이루는 것은, 닝보 지역은 오히려 곡식이 풍부했고, 백성들의 생활이 안정되었다는 점이었다. 원래 전국 각지의 상인들이 닝보의 쌀값이 높고 이윤이 많다는 소식을 듣고, 너도나도 닝보로 쌀을 팔러 왔던 것이다. 닝보의 백성들은 비록 오랫동안 모은 저축을 단숨에 다 써버렸지만, 기아민은 거의 발생하지 않았다. 쌀을 살 수 없는 가정들에게는 왕안석이 은전을 주어 구제했다.
그 후, 닝보의 쌀은 점점 더 쌓여서 마침내 공급이 수요를 초과하게 되었다. 상인들은 이미 쌀을 운반해 왔기 때문에 다시 되돌려보내기 어려워, 어쩔 수 없이 현지에서 가격을 낮춰 판매했다. 쌀값은 천천히 다시 석당 1500문으로 내려왔다.
강남 다른 지역과 비교하면, 닝보는 마치 이상향이었다.
원래 강남은 산간(陝甘) 등 빈약한 지역과는 달랐다. 이곳은 오래전부터 부유했으며, 물고기와 쌀이 풍부할 뿐 아니라 상업도 매우 발달했다. 일반 가정들도 수십 년간 조금씩 저축해 왔다. 따라서 흉년을 맞닥뜨리면 사람들이 필요한 것은 오직 식량뿐이었다. 비록 쌀값이 높더라도, 검소하게 지내면 일 년 반 정도는 버틸 수 있었다.
이제야 뤼샹고는 비로소 왕안석이 진짜로 한 수 위임을 깨달았다. 그는 정말 뛰어났다. 그는 즉시 왕안석을 칭찬하고, 강남 각지에 공문을 내려 쌀값을 석당 3500문으로 올리라고 명령했다.
상인들이 이 소식을 듣고 크게 고무되어, 전력을 다해 말과 당나귀에 실어 육로와 수로를 병행하며 전국 각지에서 끊임없이 쌀을 강남으로 운반해 왔다. 강남 백성들은 재산을 다 바쳤지만, 마침내 이 위기를 넘길 수 있었다.
이 일을 계기로 왕안석의 명성은 크게 높아졌고, 이후 승승장구하여 북송 시대의 명신이 되었다.
(황위, 『우성야보』 2009년 11월 11일에서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