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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투문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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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굴하게 아첨하다 (노안비슬)

By 故事大全 , 24 August 2025

【출전】 (당나라) 노귀몽(陸龜蒙)의 『강호산인가(江湖散人歌)』
【해석】 노(奴): 노예. 안(顏): 얼굴. 비(婢): 여종. 슬(膝): 무릎으로, 무릎을 꿇는 것을 의미한다. 마치 노예처럼 비굴하고 아첨하는 얼굴과 여종처럼 빌어먹는 듯 무릎을 꿇는 모습을 비유한다. 노예 같은 태도로 부끄러움도 없이 남에게 아첨하고 빌광하는 태도를 묘사한다.

【역사 전승】
송나라 흠종의 정강 2년(서기 1127년), 금나라 병사들이 남쪽으로 쳐들어와 마치 무인의 경지를 누비듯 하며 금방(오늘날의 허난성 개봉)을 신속히 함락시키고 휘종과 흠종 두 황제를 포로로 잡았다. 이를 역사적으로 '정강의 치욕(靖康之恥)'이라 한다. 이 사건 후, 흠종 조환의 동생 조구는 대신들의 도움을 받아 응천부(오늘날의 허난성 상구)에서 황제로 즉위하여 남송 왕조를 세웠다. 이후 수도를 임안(오늘날의 저장성 항저우)으로 옮기고 목숨을 부지하며 금나라가 제기하는 부당한 요구를 모두 수용했다. 송나라 이종 때에는 간신 가사도를 재상으로 임명하면서 조정의 정치가 더욱 혼란에 빠졌다.

가사도(賈似道)는 자가 사헌(師憲)인데, 누이가 궁중에 들어가 귀비가 되었기에 '치마 끝'의 관계를 이용해 관직에 올랐다. 가사도는 아첨과 빌광에 매우 능하여 금세 지방 고위 관료가 되었고, 이후 참지정사(參知政事)와 지추밀원사(知樞密院事)로 승진하며 서서히 조정의 실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이종 개경 원년(서기 1259년), 오주가 몽골군에 포위되었을 때, 가사도는 군대를 이끌고 구원에 나섰으나 전투도 시작하기 전에 몽골에 몰래 항복하고 공물을 바쳤다. 실리를 얻은 몽골군은 곧바로 병력을 철수했다. 그러나 가사도는 이 전투를 '대승리'라고 거짓 보고했고, 진상을 알지 못한 이종은 그를 우승상으로 승진시켰다. 이후 그는 술수를 써서 이견을 가진 세력을 제거하고 조정의 모든 권력을 독점하게 되었다.

이종이 죽고 목종이 즉위하자, 가사도는 태사(太師)에 봉해졌고, 조정의 모든 정사는 그의 사저에서 논의되었다. 상양성이 몽골에 4년간 포위되었으나, 그는 오직 몽골에게 애걸할 뿐이었다. 조정 대신들 대부분은 그의 추종 세력이었고, 오직 진중미(陳仲微)라는 한 사람만이 그의 죄행을 폭로할 수 있었다. 진중미(字: 지광)는 예전에 가사도를 모욕했다는 이유로 파면된 적이 있었다. 그는 복직된 후에도 계속하여 당시 정치를 비판하는 상소를 올리며 "군도상업, 양유소규(君道相業,兩有所虧)!"라며 국왕과 재상의 무능함을 비판했다. 송나라 휘종과 고종 때에도 마찬가지로, 군주는 어리석은 군주였고 재상은 간사한 재상이었으며, 그 때의 간신들은 처음에는 황제에게 극진히 아첨하며 영광을 누렸으나, 결국 적에게 항복하여 적에게 신하로 복종했다고 지적했다. 진중미는 목종과 가사도 등이 휘종과 고종 시대의 옛 교훈을 거울삼아 국가의 중요 사무를 계속 방치하지 말 것을 요구했다. 진중미는 목종에게 올린 간쟁서에서 "수를 숙이고 마음을 드러내며, 비굴하게 아첨하고 무릎 꿇는다(俯首吐心,奴顏婢膝)"라는 표현을 사용하여 이러한 간사하고 아첨하는 권신들을 묘사했다.

분류
성어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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