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인(酒人)이라는 두 글자를 꺼내 들면, 사람들의 귀를 솔깃하게 하고 실로 사소한 일을 크게 부풀리는 것이다.所谓 주인(酒人), 그저 술을 좋아하는 사람일 뿐이다. 『사해(辭海)』에서는 스스로를 주인이라 칭하면 광오함이 내포되어 있고, 남을 주인이라 칭하면 대부분 비하하는 뜻을 담고 있어 상당히 타당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고대인들의 시각에서는 반드시 그렇지만은 않았다. 당나라의 유명한 문학가 원결(元結)은 주인을 두고 찬양하는 노래를 지어 불렀다. '산을 술잔 삼고, 물을 연못 삼아, 주인들이 섬마다 뚜렷이 앉아 있네.' 고양주인(高陽酒人)을 말하면, 한(漢)나라는 그의 나라에 대한 공로를 칭송하며, 술로써 큰일을 이룬 기록도 전해진다!
고양주인(高陽酒人) 여식기(酈食其, 음역 기)는 진류(陳留) 고양 사람으로, 오늘날 허난성 기현(杞縣)의 남서쪽 지역이며, 한고조 유방(劉邦)의 모사였다. 어릴 때부터 큰 뜻을 품고 책을 좋아했으나, 가난하고 몰락하여 생업을 삼을 길이 없었다. 술을 좋아하다가 결국 문을 지키는 감문리(監門吏)로 일하게 되었다. 현내 관부와 현달한 자들은 감히 그를 쓰지 못하고 모두 '광생(狂生)'이라 불렀다. 그러나 그는 굳게 믿고 기회를 기다렸다. 기원전 209년, 진승(陳勝)과 오광(吳廣)이 '무도한 자를 토벌하고 폭정의 진(秦)을 제거한다'는 깃발을 들자 천하의 영웅들이 일제히 호응하였다. 그때 항량(項梁)이 회계(會稽)에서 병사를 일으키고, 유방이 패(沛)에서 병사를 일으켜 봉기의 폭풍이 온 나라를 휩쓸었다. 진승, 항량 등 봉기군이 고양을 지나갔을 때, 여생(酈生)은 모두를 경멸하며 그들은 모두 눈앞의 이익만 보는 천한 자들이라, 큰 뜻을 품은 말을 들을 수 없다고 여겼다. 오직 패공 유방만이 '사람을 업신여기긴 하나 큰 뜻을 가지고 있으니, 이것이야말로 내가 따르고자 하는 사람이다!'라고 하며 스스로 패공에게 추천하였다.
패공 유방은 자가 계(季)이며, 어진 마음으로 사람을 사랑하고 생산노동을 좋아하지 않으며, 베풀기를 좋아하고 마음이 넉넉하고 훌륭하여 늘 큰 도량을 보였다. 장년기에 사수정장(泗水亭長)을 지냈으며, 한 지역에서 유명한 무뢰배였다. 술과 미색을 좋아하여 자주 술집에서 취해 쓰러져 자곤 했으니, 참으로 전형적인 주인(酒人)이었다. 운 좋게도 취한 상태에서 여공(呂公)에게 인정받아 그의 딸 여후(呂后)를 아내로 삼았고, 술에 취해 백사(白蛇)를 베어 죽인 일로 명성을 얻고 자부심을 가지게 되어 진나라에 반기를 들었다. 기원전 207년(이세삼년), 패공은 병사를 이끌고 서쪽으로 나아가 도적 출신인 봉월(彭越)의 봉기군과 만나 공동으로 진군을 공격했으나 승리하지 못했다. 이후 창의(昌邑)를 함락시키지 못하자, 서쪽으로 고양을 지나 여식기를 알게 되었고, '대인장자(大人長者)'라 하여 면담을 청하였다.
어느 날, 유방이 침상에 앉아 두 여인이 발을 씻겨주고 있었다. 갑자기 마을에서 한 유생이 면담을 요청한다는 소식이 들어왔다. 이 사람은 이미 60세가 넘었고 키가 8척으로, 모두가 그를 '광생'이라 불렀으나 본인은 미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유방은 늘 유생을 경멸해왔고, 과거 유생을 만나면 종종 유생의 모자를 오줌통으로 사용하여 유생들을 모욕시켰다. 오늘 갑자기 유생이 면담을 요청하자 크게 분노하여 사람을 시켜 접견을 거절하고 말했다. '나는 천하의 대사를 중히 여기니, 유생을 접견할 시간이 없다.' 오랫동안 기다리던 여식기는 이 말을 듣고 즉시 '눈을 부릅뜨고 칼을 손에 쥔 채 사자를 꾸짖으며 말했다. '어서 돌아가서 패공께 알리라. 나는 고양의 주인(酒人)이니 유생이 아니다!' 사자가 서둘러 보고하자, 유방은 '고양의 주인'이라 자칭하는 것을 듣고 온 사내가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음을 알고, 급히 발 닦을 것도 없이 '다리를 고이고 창을 짚으며' 말했다. '들어오라!' 여식기가 들어가자, 패공에게 큰 절만 하고 절하지 않으며 말했다. '폭정의 진을 무너뜨리고자 하면서 어찌 이토록 노인을 오만하게 대하시오? 진을 도와 제후를 공격하시려는가, 아니면 제후를 이끌고 진을 무너뜨리시려는가?' 이때 유방은 당황하여 발 씻는 것을 멈추고 옷을 여며 입으며 서둘러 여식기를 윗자리에 앉히고 사죄했다. '예전에 사람들의 말로 선생의 용모만 들었는데, 오늘 뵙고서야 선생의 뜻을 알았소!' 그리고 그의 계책을 물었다. 이 고양주인이 말했다. '당신은 잡다한 병졸들을 모아 어지럽게 된 군대를 수습하여 만 명도 안 되는 병력을 가지고 강력한 진에 곧장 들어가려 하시니, 이는 호랑이 입에 손을 넣는 것과 같습니다. 진류(陳留)는 천하의 요충지요, 사방으로 통하는 교차로입니다. 지금 그 도시 안에는 곡식이 풍부하게 쌓여 있습니다. 나는 그 현령을 알고 있으니, 지금 제가 그를 설득하여 당신에게 항복하게 하겠습니다. 만약 듣지 않는다면 당신이 군대를 일으켜 공격하시고, 저는 내부에서 응하겠습니다.' 이렇게 하면 큰일을 이룰 수 있겠습니다.
이에 유방은 여식기의 제안을 받아들여 먼저 진지를 공격하기로 결정하고, 여식기를 내응(內應)으로 파견하였다. 여식기는 현성에 가서 진류현령을 만나 진나라가 쇠락하고 한왕이 흥할 이치를 설명하며 유방에게 항복할 것을 권유했다. 그러나 현령은 진나라 법의 엄중함을 두려워하여 감히 무모하게 행동하지 못하고 거절하였다. 그날 밤 자정에 여식기는 현령을 살해하고 그의 머리를 성 밖으로 내려 패공에게 알렸다. 유방은 큰일이 성사된 것을 보고 병사를 이끌고 현성을 공격하며 사람을 시켜 대나무 지팡이에 현령의 머리를 꽂아 크게 외치게 했다. '서둘러 항복하라! 너희 현령은 이미 참수당했다! 그렇지 않으면 나중에 성을 내주는 자도 참수당할 것이다!' 성 위의 수비병들은 현령이 죽은 것을 보고 더 이상 지킬 뜻이 없어 성문을 열고 항복하였다. 유방은 성에 들어가 '무기와 식량, 저장된 곡식을 얻어 세 달 동안 먹고 쓸 수 있었으며, 병사는 만 명 이상으로 늘어나 마침내 진을 무너뜨렸다.' 이 모든 것이 고양주인의 공로였다.
고양주인 여식기의 역할은 나라에 큰 공을 세겼으며, 주로 다음 몇 가지가 있다.
첫째, 유방이 망설이며 주저하고 있을 때, 여식기가 진류 공격 방향을 제시하여 유방의 진나라 반란 첫 공이 되었다.
둘째, 진 공격으로 얻은 곡식은 봉기군의 3개월 치 군량이 되어 후방 지원에 걱정이 없었고, 전진할 힘을 얻었다.
셋째, 진 공격으로 봉기군의 세력이 확대되었으며, 특히 수백 명의 병사에서 진류 함락 후 만 명으로 병력을 늘렸다.
넷째, 유방은 과거 늘 지식인을 깔보았으나, 이 고양주인을 접견한 후 비로소 큰일을 성사시키기 위해 지식인이 모의하고 책략을 세워주는 것이 없으면 성공하기 어렵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후 유방은 여식기를 광야군(廣野君)으로 봉작할 뿐만 아니라, 그의 동생 여상(酈商)을 장군으로 중용하여 수천 명의 병사를 거느리고 유방을 따라 남북으로 전쟁을 치르며 땀과 말을 다했던 공을 세웠다. 여식기는 유방에게 중히 여김을 받아, 주인(酒人)이 오히려 유방의 창업 초기 중요한 모사 중 한 명이 되었다. 이후 유방을 위해 사방을 설득하며 제후들을 분열시키는 데도 많은 공을 세웠다. 기원전 204년 초한쟁패(楚漢相爭) 시기, 그는 유방에게 다음과 같이 건의했다. '두 영웅은 함께 공존할 수 없다. 초와 한이 오랫동안 결판 없이 대치하면, 백성은 소요되고 천하가 요동치며 농부는 쟁을 버리고 직녀는 기계를 내려놓아 천하의 마음이 아직 정착되지 않았다. 바라건대 당신께서 급히 병사를 다시 진격시켜 영양(滎陽)을 점령하고, 오창(敖倉)의 곡식을 장악하며, 성고(成皋)의 요새를 막고, 태항산(大行)의 길을 차단하며, 비호구(斐狐之口)를 거점 삼고, 백마진(白馬之津)을 지켜 제후들에게 실질적인 형세를 보여주면 천하가 귀속될 것입니다.' 또한 병력과 장수가 많고 한 지역을 할거하고 있던 제왕 전광(田廣)을 설득하겠다고 자청했다. 고양주인의 이 제안은 유방이 천하를 얻는 전략 사상이 되었다. 유방은 그를 보내 전광을 설득하게 하였고, 천하의 이익과 해악을 설명하자 '전광은 옳다고 생각하여 여생의 말을 듣고, 여하(歷下)의 병사 방어 준비를 해제하고 여생과 함께 매일 술을 마시며 방탕하게 지냈다.' 그러나 한신(韓信)이 기회를 틈타 제(齊)를 공격하자 전광은 오해하여 여식기가 자신을 배신했다고 생각하고 여식기를 삶아 죽였다. 죽기 직전 전광이 그에게 말했다. '한군을 멈출 수 있다면 내가 너를 살려주겠다.' 여생이 답했다. '큰 일을 벌일 때는 사소한 예의를 따지지 않으며, 위대한 덕은 변명하지 않는다. 당신을 위해 더 이상 말하지 않겠다.' 개의치 않고 의연히 죽음을 맞이했다.
여식기가 죽은 후, 유방이 황제가 되어 열후(列侯) 공신들을 포상할 때, 여식기의 아들 여개(酈疥)를 고량후(高粱侯)로 봉작하여 전의 공로를 잊지 않았음을 보여주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여식기의 이름은 사람들 사이에서 점차 사라졌으나, '고양주인(高陽酒人)'은 오히려 그의 대명사가 되었다. 술을 좋아하는 자들은 종종 스스로를 이 말로 비유하며 매우 영광스럽게 여긴다. 아마도 그 때문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