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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투문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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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빈의 이야기

By 故事大全 , 9 September 2025

전국시대의 유명한 군사가. 생몰연도는 알려져 있지 않으며 본명도 전해지지 않는다. 약 기원전 4세기 후반에 활동했고, 제나라 사람(지금의 산둥성 쩐청 현)이며 오나라 장군 손무의 후손이다. 그는 어릴 적 명문 고인 귀곡자에게서 팽건과 함께 수학했다고 전해진다. 팽건은 위혜왕의 장군이었으나 손빈의 재능을 시기하여 그를 위나라로 속여 데려와 빈형(무릎뼈를 절단하는 형벌)을 가했다. 그래서 손빈이라는 이름이 붙게 되었다. 이후 제나라 사신에 의해 비밀리에 제나라로 돌아왔고, 장군 전계의 추천으로 제위왕에게 중용되어 참모장(군사)이 되었다. 제나라와 위나라의 패권 경쟁에서 결정적인 의미를 갖는 계릉전투와 마릉전투에서 손빈은 제나라 군대를 지휘하여 두 차례 위군을 격파하고, 팽건으로 하여금 자결하게 함으로써 제나라를 강국 반열에 올려놓았다. 그는 전투에서 실력을 피하고 허약한 곳을 공격하며, 적이 반드시 구해야 하는 곳을 타격하는 원칙을 적용하여 '위를 포위하여 조를 구한다'는 유명한 전술을 창안하였으며, 이는 고금의 병가들이 본받아온 전략이다. 손빈과 그의 제자들이 저술한 『손빈병법』은 손무의 군사 사상을 계승하고 전국중기 이전의 전쟁 경험을 정리하여 뚜렷한 시대적 특성을 지니며 후세에 소중한 군사 이론 유산을 남겼다.

위혜왕도 진효공을 본받아 상앙과 같은 인재를 찾고자 하였다. 그는 많은 재물을 들여 천하의 영웅호걸들을 불러들였다. 팽건이 찾아와 부국강병의 도리를 설명하자, 위혜왕은 매우 기뻐하며 팽건을 대장으로 임명하였다. 팽건은 실제로 능력이 있었으며 매일 군사를 연습하고 주변 작은 나라부터 공격하여 연이어 승리를 거두었고, 나중에는 제나라마저 무찌르게 되었다. 그때부터 위혜왕은 팽건을 더욱 신뢰하게 되었고, 팽건 스스로도 훌륭한 인재라고 여겼다. 그러나 그는 자신과 동문인 제나라 사람 손빈의 능력이 자기보다 낫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손빈은 오나라 장군 손무의 후손이라 하며, 오직 그만이 가전된 『손자병법』을 알고 있다고 한다.

위혜왕 또한 손빈의 명성을 듣고, 어느 날 팽건과 손빈에 대해 언급하였다. 팽건은 사람을 보내 손빈을 초빙하여 위나라에서 함께 일하게 하였다. 그런데 팽건은 악의를 품고 손빈이 제나라와 내통한다고 위혜왕 앞에서 모함하였다. 위혜왕은 크게 노하여 손빈을 벌하였고, 그의 얼굴에 문자를 새긴 뒤 무릎뼈 두 개를 도려냈다. 다행히 제나라 사신이 위나라를 방문 중이었는데, 몰래 손빈을 구출하여 제나라로 데려왔다. 제나라 장군 전계는 손빈이 훌륭한 장수임을 듣고 그를 제위왕에게 추천하였다. 제위왕 역시 개혁을 통해 국력을 강화하고자 하던 참이었고, 손빈과 병법을 논의한 후 크게 감복하여 더 일찍 만나지 못한 것을 한탄하였다.

기원전 354년, 위혜왕이 팽건을 파견하여 조나라를 공격하게 하였고, 조나라 수도 한단(현재의 하북성 한단 서남쪽)을 포위하였다. 다음 해, 조나라가 제위왕에게 구원을 요청하였다. 제위왕은 손빈을 대장으로 임명하고자 하였으나, 손빈은 서둘러 사양하며 말했다. "안 됩니다. 저는 형벌을 받은 불구의 신체를 가진 자입니다. 제가 대장이 되면 사람들에게 조롱당할 것입니다. 대왕께서는 전대부를 대장으로 임명해 주십시오."于是 제위왕은 전계를 대장으로, 손빈을 군사로 임명하고 조나라를 구원하기 위해 군대를 출병시켰다. 손빈은 천막이 있는 수레 안에 앉아 전계를 도와 작전을 세웠다. 손빈이 전계에게 말했다. "지금 위나라는 정예 병력을 모두 동원하여 조나라를 공격하고 있으므로 국내에는 노약병만 많아 매우 허약합니다. 우리는 오히려 위나라의 수도 대량을 공격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팽건이 이 소식을 듣고는 반드시 한단을 버리고 후퇴할 것입니다. 우리는 길목에서 기다렸다가 정면으로 맹렬히 공격하면, 틀림없이 그를 격파할 수 있습니다." 전계는 이 계책에 따라 행동하였다. 팽건의 군대가 이미 한단을 함락시킨 직후, 제나라가 대량을 공격한다는 소식을 듣고 즉시 철군을 명령하였다. 방금 계릉(현재의 허난성 창원 북서쪽) 지역에 도착했을 때, 마침 제나라 군대와 맞닥뜨렸다. 양측이 교전하자 팽건은 대패하였고, 제나라 군대는 승리하여 돌아왔으며, 한단 포위도 해제되었다.

기원전 341년, 위나라가 다시 군대를 보내 한국을 공격하였다. 한국도 제나라에 구원을 요청하였다. 그 무렵 제위왕은 이미 죽었고, 그의 아들 제선왕이 전계와 손빈을 파견하여 한국을 구원하게 하였다. 손빈은 또다시 익숙한 전략을 사용하여 한국을 직접 구하지 않고 바로 위나라를 공격하였다. 팽건이 본국의 긴급 보고를 받고 어쩔 수 없이 군대를 철수하여 돌아갔지만, 이미 제나라 군대는 위나라境内에 들어와 있었다. 위나라는 대규모 병력을 동원하여 태자 신이 지휘하게 하여 제나라 군대에 맞섰다. 이때 제나라 군대는 이미 후퇴한 상태였다. 팽건이 제나라 군대가 주둔했던 곳을 살펴보았더니, 진영이 매우 넓은 면적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는 사람을 시켜 밥을 짓는 화덕 수를 세어보니 십만 명이 먹기에 충분하였다. 팽건은 놀라 말을 잃고 말았다. 다음 날, 팽건은 대군을 이끌고 제나라 군대가 두 번째 진을 친 곳에 도착하여 화덕 수를 세어보니 오만 명이 쓸 수 있는 정도였다. 사흘째 되는 날, 그들은 제나라 군대가 세 번째 진을 친 곳까지 추격하여 꼼꼼히 화덕 수를 세어보니 이제 겨우 이만 명이 쓸 수 있는 정도만 남아 있었다. 비로소 팽건은 안심하고 웃으며 말했다. "내가 예전부터 알아왔다. 제나라 군대는 모두 겁많은 겁쟁이다. 십만 대군이 위나라에 들어온 지 불과 사흘이 지났을 뿐인데, 벌써 대부분 도망쳐 버렸구나." 그는 위나라 군대에게 제나라 군대가 지난 길을 따라 밤낮없이 추격하도록 명령하였다. 결국 마릉(현재의 하북성 다밍현 동남쪽)에 이르렀고, 때마침 해가 어둑어둑해지는 무렵이었다. 마릉도는 매우 좁았고, 길 양옆에는 장애물들이 가득했다. 팽건은 제나라 군대를 단숨에 따라잡고 싶어 어둠 속에서도 계속 전진하라고 명령하였다. 갑자기 앞에서 병사들이 돌아와 보고했다. "앞길이 나무로 막혀 있습니다!" 팽건이 앞으로 나아가 보니, 과연 길가의 나무들이 모두 베어졌고 가장 큰 나무 하나만 남아 있었다. 자세히 살펴보니 그 나무 한쪽 면은 수피가 벗겨져 하얀 나무속이 드러나 있었고, 그 위에는 흐릿하게 커다란 글자가 쓰여 있었지만, 어두워서 잘 보이지 않았다. 팽건이 병사들에게 불을 가져오라고 명령하였다. 몇몇 병사들이 횃불을 켰고, 불빛 아래 보니 나무속에 다음과 같은 글귀가 선명하게 쓰여 있었다. "팽건, 이 나무 아래서 죽는다." 팽건은 크게 놀라 즉시 철수를 명령했으나 이미 늦었다. 사방에서 수많은 화살이 메뚜기떼처럼 위군을 향해 쏟아졌다. 순간 마릉도 양쪽에서 함성이 울려퍼지고, 사방에 제나라 병사들이 나타났다. 원래 이것이 손빈이 꾼 계책이었다. 그는 고의로 매일 화덕의 수를 줄여 팽건이 추격하도록 유도한 것이었다. 그는 위군이 이 시간에 마릉에 도착할 것임을 미리 계산하고, 이미 궁수들을 매복시켜 두고 불빛이 나무 아래에서 나타나면 일제히 화살을 쏘도록 지시해 놓은 것이었다. 팽건은 궁지에 몰려 결국 검을 뽑아 자결하고 말았다. 제나라 군대는 승세를 타고 위군을 대파하고, 위나라의 태자 신까지 사로잡았다.

그 후로 손빈의 명성은 제후국들 사이에 널리 퍼졌다. 그가 쓴 『손빈병법』은 대략 동한 말기에 이미 실전되었다고 한다.

분류
역사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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