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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무보 전투

By 中国のストーリーサイト | 3:31 PM CST, Mon September 15, 2025

명태조가 재위할 당시, 역사상 환관들의 전횡이 국가를 혼란에 빠뜨린 교훈을 얻어, 환관이 국가 정사를 간섭하지 못하게 하는 규정을 세웠다. 그는 이 규정을 커다란 철제 패판에 새겨 궁전에 걸어두고, 자손 대대로 이를 준수하기를 바랐다. 그러나 명성조 때에 이 규정은 폐지되고 말았다.

명성조는 조카로부터 황제 자리를 빼앗아 얻었기 때문에, 신하들이 자신을 반대할까 두려워하여 주변의 환관들을 특별히 신뢰했다. 북경으로 수도를 옮긴 후, 동안문 밖에 '동창(東廠)'을 설치하여 신하들과 백성들 사이에 반란을 꾀하는 용의자가 있는지 전문적으로 밀고하도록 했다. 외부 신하들을 믿을 수 없다고 여겨, 측근 환관을 동창 제독으로 임명했다. 이렇게 해서 환관들의 권력이 점점 커졌다. 명선종 때에는 황제가 주자(奏章)를 검토하는 일까지 한 명의 환관에게 대신하게 했는데, 이 직책을 사예감(司禮監)이라 불렀다. 이로써 환관들의 권력은 더욱 커졌다. 어느 해 궁중에서 환관들을 모집했는데, 위주(蔚州, 지금의 허베이성 위현, '위'는 yù로 발음) 출신의 한 건달 왕진(王振)이 있었다. 그는 젊었을 때 약간의 책을 읽었고, 몇 차례 과거 시험을 봤으나 합격하지 못해 현에서 교관으로 일했다. 이후 죄를 지어 원래 군대에 징집되어야 했지만, 궁중에서 환관을 모집한다는 소식을 듣고 자진해서 궁중에 들어가 환관이 되었다. 궁중에 글을 아는 환관은 많지 않았고, 왕진만이 대충 문장을 읽을 수 있었기에 모두들 그를 '왕선생'이라 불렀다. 이후 명선종은 그를 파견해 태자 주기진(朱祁鎮)에게 책을 가르치게 했다. 주기진은 어려서 놀기를 좋아했고, 왕진은 온갖 방법을 동원해 그가 즐겁게 놀 수 있도록 했다. 주기진은 왕진을 매우 좋아하게 되었다.

명선종이 죽은 후, 겨우 아홉 살 된 태자 주기진이 즉위하여 명영종이 되었다. 왕진은 사예감이 되어 명영종을 도와 주자들을 검토했다. 명영종은 오직 놀기에만 열중하고 국정에는 전혀 관심을 두지 않았다. 왕진은 이 기회를 틈타 조정의 군사·정치권을 장악했다. 조정의 고위 관리들 중 누구라도 왕진을 건드린다면 해임되거나 유배를 가게 되었다. 일부 왕공 귀족들도 왕진의 기분을 얻기 위해 그를 '옹부(翁父)'라 불렀다. 왕진의 권력은 말 그대로 하늘을 찌를 지경이었다.

이 무렵, 우리 나라 북방의 몽골족 와라(瓦剌, '라'로 발음) 부족이 세력을 키웠다. 서기 1449년, 와라의 수령 야셴(也先)은 3,000명의 사신을 북경에 보내 말을 공물로 바치고 상금을 요구했다. 왕진은 야셴이 사신 수를 거짓으로 부풀렸다는 것을 발견하고, 상금과 말값을 삭감했다. 야셴이 아들을 위해 명나라와 혼사를 청했지만, 왕진은 이를 거절했다. 이로 인해 야셴은 격노하여 와라 기병을 이끌고 대동(大同)을 공격했다. 대동을 지키던 명나라 장군들이 출병하여 저항했지만, 와라군에게 크게 패배하고 말았다.

변경의 관리들이 조정에 급보를 보내자, 명영종은 당황하여 신하들을 급히 소집해 대책을 논의했다. 대동은 왕진의 고향 위주와 멀지 않았고, 왕진은 위주에 방대한 토지를 소유하고 있었다. 그는 위주가 와라군에 의해 침범될까 두려워, 영종이 친히 군대를 이끌고 원정하는 것을 적극 주장했다. 병부상서(兵部尙書, 병부상서와 시랑은 군사 기관의 정·부 장관) 쿠앙예(鄺埜, '쿠앙예'로 발음, '예'는 '야'와 동음)와 시랑 위겸(于謙)은 조정이 충분한 준비가 되지 않았기 때문에 친정(親征)을 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명영종은 의견이 없는 인물이라 왕진이 어떻게 말하면 그대로 따랐고, 신하들의 만류를 무릅쓰고 무모하게 친정을 결정했다.

명영종은 동생 청(郕, '청'으로 발음)왕 주기옥(朱祁鈺, '유'로 발음)과 위겸에게 북경을 지키게 하고, 자신은 왕진, 쿠앙예 등 100여 명의 관리들과 함께 50만 대군을 이끌고 북경을 출발하여 장엄하게 대동으로 향했다.

이번 출병은 처음부터 제대로 준비되지 않았고, 군대의 기강은 해이했다. 길에서는 폭풍우를 만나며 며칠 가지 못해 식량이 떨어졌고, 병사들은 배고프고 추워서 와라병과 조우하기도 전에 이미 원성을 토해냈다. 대동 근처에 도착하자 병사들은 교외 들판 여기저기 명나라 병사들의 시체가 널브러져 있는 것을 보고 더욱 불안해졌다. 한 신하는 사기가 저하된 것을 보고 영종에게 철수를 권했지만, 왕진에게 심하게 꾸중을 듣고 하루 동안 무릎 꿇고 벌을 받았다.

며칠 후, 명군 선봉대가 대동 성 근처에서 와라군에게 전멸당했고, 각지의 명군이 무너지며 후퇴하기 시작했다. 이때 비로소 왕진은 상황이 위급하다고 느끼고 북경으로 철수할 것을 명령했다. 철수는 빠를수록 좋지만, 왕진은 고향 위주에 가서 위세를 떨쳐보려고 영종에게 위주에 며칠 머물자고 권했다. 수십만의 장병들이 대동을 떠나 위주 방향으로 사십 리를 달렸다. 왕진은 다시 생각했다. 이 많은 병마가 위주에 들어오면 자기 가족의 밭에 있는 작물들이 큰 피해를 입을 텐데, 급히 명령을 내려 되돌아가게 했다. 이렇게 오갈 때, 철수 시간이 지연되어 와라의 추격군에게 따라잡히고 말았다.

명군은 저항하면서 후퇴하다 결국 투무보(土木堡, 지금의 허베이성 화이라이 동쪽)에 도달했다. 그때 해가 막 지고 있었다. 누군가 영종에게 밤이 되기 전에 조금 더 서둘러 화이라이 성(懷來城, 지금의 허베이성 화이라이)에 들어가 쉬자고 했고, 와라군이 와도 방어할 수 있다고 했다. 그러나 왕진은 자신의 재산을 나르는 수천 대의 수레가 도착하지 않았기 때문에, 군대를 투무보에서 반드시 멈추게 했다. 투무보는 이름은 '보(堡)'지만 실제로는 지킬 성도 없었다. 명군 대군은 며칠을 행군한 끝에 목이 불타는 듯 말랐지만, 투무보에는 물이 없었다. 투무보에서 15리 떨어진 곳에 강이 있었지만, 이미 와라군이 점령하고 있었다. 병사들이 그 자리에서 우물을 파서 2장 깊이까지 도달했지만 물을 찾지 못했다.

다음날, 하늘이 막 희미하게 밝아올 무렵 와라군이 투무보에 도착하여 명군을 꽉 묶듯 포위했다. 명영종은 돌파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야셴에게 화평을 청하기 위해 사람을 보냈다. 야셴이 알아보니 명영종이 이끄는 명군 수가 여전히 적지 않아 강행 공격 시 자신도 큰 피해를 입을 것이 분명했다. 그래서 화평을 허락하는 척하고 공격을 중단했다.

명영종과 왕진은 진짜로 화평이 성사된 줄 알고 매우 기뻐하며, 병사들에게 주변에서 물을 찾으라고 명령했다. 병사들은 앞다투어 해자를 뛰어넘어 강가로 달려갔고, 아수라장이 되어 장령들이 막으려 해도 통제할 수 없었다.

그때, 이미 매복해 있던 와라군 병사들이 사방에서 돌격하여, 모두 장도를 휘두르며 큰 소리로 외쳤다. "항복하면 죽이지 않는다!"

명군 병사들은 이 말을 듣자마자 갑옷과 투구를 버리고 미친 듯이 도망쳤다. 와라군은 뒤쫓아가며 살육했고, 죽임을 당하거나 난군에 밟혀 죽은 자가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쿠앙예도 혼란 속에서 살해되었다.

명영종과 왕진은 일부 금군(禁軍)을 이끌고 여러 차례 돌파를 시도했지만 빠져나가지 못했다. 늘 위세를 떨치던 왕진은 이때는 무서워서 떨고만 있었다. 금군 장령 판충(樊忠)은 오래 전부터 나라와 백성을 황폐하게 만든 이 간사한 역적을 미워하며 분노하여 "내가 천하 백성을 위해 너라는 간적을 죽이겠다!"라고 외치며 손에 든 커다란 철추를 들어 왕진의 머리통을 내리쳐 그 목숨을 끊었다. 판충 자신도 와라군을 향해 돌격하여 싸우다가 총에 맞아 쓰러졌다.

명영종은 탈출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보고 마에서 내려와 다리를 꼬리고 앉아 죽음을 기다렸다. 와라병이 달려와 그를 포로로 잡았다. 역사적으로 이 사건을 '투무지변(土木之變)'이라 부른다.

이 전투를 통해 50만 명의 명군 중 절반 이상을 잃었고, 명나라 왕조는 크게 손상되었다. 와라 수령 야셴은 더욱 오만해졌고, 북경도 와라군의 위협을 받게 되었다. 수도를 지키는 책임은 영종의 동생 청왕 주기옥과 위겸에게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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