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한 시대에 반초는 형 반고를 도와 『한서(漢書)』를 함께 편찬했다. 그러나 그는 한 남자의 포부가 종이와 붓에만 국한되어서는 안 된다고 여겼기에 문관의 길을 버리고 무관이 되어 흉노와의 전투에 참가했다. 그의 강인하고 결단력 있는 성격은 전장에서 끊임없이 공을 세우게 했다.
남제(南齊) 고제 소도성(蕭道成)이 재위할 당시, 궁중에서는 특별한 서예 대회가 열렸다. 대회에 참여한 한쪽은 바로 당시의 황제 소도성이었다. 본래 금위군 장수였던 소도성은 어쩌다 서예에 푹 빠지게 되었는지 모를 일이다.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부지런히 연습하여, 마침내 즉위하여 황제가 되었을 무렵에는 훌륭한 글씨를 쓸 수 있게 되었다.
1728년, 청나라 세종 옹정제는 전국적으로 북경 관화(官話)를 보급하기 위해 '정음서관(正音書館)'을 설립했다. 그는 복건(福建)과 광동(廣東) 두 성에 한민족의 공통어(옛날에 '관화'라 불렀음)를 보급할 것을 명령하고, "거인(擧人), 생원(生員), 공감(貢監), 동생(童生) 중 관화를 능숙히 하지 못하는 자는 시험에 응시하지 못하게 한다"고 규정했다. 즉, 책을 읽는 사람이 관화를 듣고 이해하지 못하거나 말하지 못하면 과거 시험에 응시할 수 없다는 의미이다.
양견(541-604)은 한족으로써 홍농군 화음(현재의 산시성 화음현) 출신으로 수나라의 개국 황제이며, 한나라 태위 양진의 14세손이다. 재위 기간 동안 수백 년간 심각하게 분열된 중국을 성공적으로 통일하였으며, 선진적인 관리 선발 제도를 개척하고 문화와 경제를 발전시켜 중국을 번영의 나라로 만들었다.
당나라의 정관지치는 국가 경제의 번영과 문화의 발달을 가져왔고, 주변 소수민족들은 이를 매우 동경하여纷纷 사신을 파견해 우호 관계를 맺고, 신하로서 조공을 바쳤다. 많은 소수민족 지도자들이 당나라 왕실과 혼인 동맹을 맺기를 희망하며 이를 영예로 여겼다. 당태종은 국경의 평화와 각 민족 간의 화목한 공존을 확보하기 위해 화친 정책을 수립하고 시행하였다.
무후(武后)는 마치 회전등처럼 태자를 바꾸고 황제를 바꾸며, 궁극적으로는 자신이 황제가 되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그녀는 자신으로부터 다섯 대 전의 조상들을 모두 추봉(追封)하였고, 고향에 사묘(祠廟)를 세우며 외가의 친척들을 모두 중요한 관직에 임명했다. 또한 자신을 반대하던 서경업(徐敬业), 낙빈왕(骆宾王) 등의 관직을 모두 파직하였다.
송인종이라 하면 누구나 잘 알 것이다. '이묘환태자(狸猫換太子)'라는 민간 설화는 송인종의 어머니와 관련된 이야기이며, 포정(包拯)의 침방울이 얼굴에 튀었던 것도 송인종이었다. 소동파(蘇東坡), 소순(蘇洵), 왕안석(王安石), 사마광(司馬光), 구양수(歐陽修), 범중엄(范仲淹) 등 하나같이 중량급 인물들이 모두 송인종 시대의 명신들이었거나, 이 시기에 역사 무대에 등장하였다.
조양은 유수의 성장지일 뿐 아니라 발원지이기도 하다. 여기서부터 유수는 동한 왕조를 건립하였다. 조양에서 유수는 황족의 일원이자 관가의 자제에서 백정(백의 평민)으로 전락하는 과정을 겪으며 인생의 신산한 고충을 충분히 맛보았고, 세상 물정을 모르던 소년에서 신중하고 성실하며 부지런하고 검소하며 뛰어난 안목을 가진 청년으로 성장했으며, 마침내 세상을 놀라게 하고 시대를 풍류하는 위대한 역사 인물로 성장하였다.
한성제의 어머니인 왕정군 황후태후에게는 여덟 명의 형제가 있었다. 둘째 형제 왕만의 둘째 아들이 바로 왕망이었다. 일부 대신들이 왕망을 극찬하자, 한성제는 그를 신도후에 봉하고, 이후 대사마로 삼아 조정의 실권을 쥐어 주었다. 왕망은 천하의 인재를 적극적으로 영입하였고, 근거리와 원거리의 유명한 선비들이 줄지어 그를 찾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