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망의 고대 복원과 황제 등극

한성제의 어머니인 왕정군 황후태후에게는 여덟 명의 형제가 있었다. 둘째 형제 왕만의 둘째 아들이 바로 왕망이었다. 일부 대신들이 왕망을 극찬하자, 한성제는 그를 신도후에 봉하고, 이후 대사마로 삼아 조정의 실권을 쥐어 주었다. 왕망은 천하의 인재를 적극적으로 영입하였고, 근거리와 원거리의 유명한 선비들이 줄지어 그를 찾아왔다.

기원전 7년, 한성제가 죽고 새로운 군주가 즉위했는데, 이가 바로 한애제였다. 한애제는 왕정군을 태황태후로 봉했다. 그러나 한애제도 즉위 6년 만에 죽고 말았다. 이에 왕망은 겨우 아홉 살의 한평제를 즉위시키고, 태황태후 왕정군이 섭정을 맡도록 하여 국가의 모든 중요한 일은 모두 왕망이 결정하게 되었다.

왕망이 실권을 장악하자, 그의 측근들이 다시 태황태후에게 청하여 왕망을 안한공으로 가봉해줄 것을 요청했다. 그러나 왕망은 작위와 봉지를 받기를 거부하고, 병을 핑계로 침대에 누워 일어나지 않았다. 이에 태황태후는 왕망을 태부에 봉하고 안한공으로 높여 예우하며, 2만 8천 호를 가봉했다. 왕망은 작위는 받았지만, 봉지만큼은 돌려보냈다.

서기 2년, 중원지방에 가뭄과 메뚜기 떼가 발생했으나, 조정은 여전히 식량과 세금을 강하게 징수하여 전국적으로 다시 혼란이 일어났다. 백성들의 분노를 누그러뜨리기 위해, 왕망은 태황태후에게 곡식과 천을 아끼자고 건의했다. 왕망 가족은 먼저 채식을 시작했고, 왕망은 100만 전의 돈과 30경(頃)의 땅을 내어 재해민 구제비로 사용했다. 그가 앞장서자 일부 귀족과 대신들도 어쩔 수 없이 땅과 집을 내놓았다. 이렇게 되자 왕망의 명성은 더욱 높아졌다.

다음 해, 한평제가 겨우 열두 살이었을 때, 왕망은 태황태후에게 한평제의 혼사를 정해달라고 청했다. 태황태후는 왕망의 딸을 선택하여, 다음 해에 한평제의 결혼을 준비했다. 왕망은 겉으로 사양했지만 결국 동의했다. 왕망은 실권을 장악한 뒤, 한평제의 어머니 일가가 정치에 개입하는 것을 두려워하여, 한평제의 어머니 위기(衛姬)를 중산왕후로 봉하고, 중산에 머물도록 하며 수도에 들어오는 것을 금지시켰다.

해가 바뀌어 열세 살이 된 한평제가 결혼하여 왕망의 딸을 황후로 삼았고, 왕망은 국장(국회의장)이 되었다. 태황태후는 신야(신야, 지금의 허난성 신야)의 2만 5천 6백 경의 땅을 상으로 내렸지만, 왕망은 또다시 사양했다.

왕망은 왕윤(윤) 등 친신 8명의 대신을 각지로 파견하여, 왕망이 신야의 땅을 받지 않으려는 사실을 널리 알리게 했다. 중소 지주와 농민들은 땅을 빼앗는 호강들을 심히 미워하던 터라, 왕망이 땅조차 거부한다는 소식을 듣고 그를 정말 훌륭한 인물이라며 칭찬했다. 이때, 천릉후 류칭이 태황태후에게 상주하여 "주나라 시대 주공이 주성왕을 보좌했던 옛 전례를 회복하여, 안한공에게 천자의 권한을 행사하게 해야 합니다."라고 말했다.

이에 왕망은 '고대 복원'을 명분으로 한평제의 대리인이 되었다.왕망이 민정을 살피러 보낸 8명이 돌아와 온갖 종류의 왕망을 찬양하는 민요를 지어냈다. 조정 대신들, 지방 관리들, 평민들까지 포함해 왕망의 작위를 올려달라는 청원은 48만 명 이상에 달했다.

왕망의 위세가 높아질수록 한평제는 왕망을 점점 무서워하고 미워하게 되었으며, 뒤에서 불만을 토로했다. 왕망이 이를 듣고 분노했다. 어느 날, 대신들이 한자리에 모여 한평제에게 수를 기원하는 잔치를 벌였는데, 왕망이 직접 독주 한 잔을 올렸다. 한평제가 받아 마신 뒤, 다음 날 중병에 걸려 며칠 안 가 죽고 말았다. 왕망은 그 후 흉내만 내어 통곡했다.

한평제는 죽을 당시 겨우 열네 살이었고, 아들은 없었지만 한선제의 증손자들은 많았다. 그러나 왕망은 나이가 많은 이들을 선택하지 않고, 한선제의 현손(증손의 아들) 중 겨우 두 살인 유영을 골라 황태자로 세우고, 유아 황태자(유자영)라 불렀다. 왕망의 딸은 황태후가 되었다. 한고조가 개척한 유가(劉家)의 천하가 왕망의 손아귀로 넘어가려 하고 있었다.

안중후 류숭이 반기를 들었다. 그의 측근 장소가 그를 도와 백여 명의 부하를 모아 수천 명의 병사가 지키는 완성(완청)을 무모하게 공격했다. 한 번 교전하자마자 류숭의 병사들은 무너졌고, 류숭과 장소는 난전 속에서 죽임을 당했다. 류숭의 삼촌과 장소의 사촌들은 왕망의 추궁을 두려워하여 스스로 장안에 나아가 죄를 청했다. 왕망은 민심을 안정시키기 위해 그들을 모두 무죄로 석방했다.

대신들이 다시 태황태후에게 청하여 안한공의 권력을 더욱 확대해야 한다고 했다. 태황태후 왕정군은 곧 칙서를 내려 왕망을 '가황제'(가(假)는 대리라는 뜻)라 칭했다.

그러나 다음 해 가을, 동군태수 채의(채의, 채(翟)는 zhái이라 발음함)가 다시 반란을 일으켰다. 그는 황족의 일부 인물들과 연합하여 류신을 천자로 세우고, 스스로를 '대사마 주천대장군'이라 칭하며 천하에 호소했다. "왕망이 한평제를 독살하고 유가 천하를 빼앗으려 한다. 지금 이미 천자가 있으니, 모두 일어나 왕망을 토벌해야 한다." 류신과 채의는 산양군(치소는 지금의 산둥성 진샹 북서쪽)에 도착했을 때 이미 십여만의 병력을 거느리고 있었다.

경보가 장안에 도달하자, 왕망은 세 살배기 유아 황태자(유자영)를 안고 사찰에서 밤낮없이 기도하며 천하에 알렸다. 자신은 단지 임시로 권한을 대행할 뿐이며, 이 권한은 반드시 유아 황태자에게 돌려줄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왕망은 '대리 황제'로는 천하를 다스릴 수 없다고 느꼈고, 차라리 진정한 황제가 되는 것이 낫다고 생각했다. 이때 한 무리의 사람들이 하늘의 명령을 빙자하여 "왕망은 하늘의 진정한 천자다."라고 외쳤고, 고제사당에서는 "한고조가 왕망에게 황위를 물려주라"는 문구가 새겨진 동상자도 '발견'되었다.

이제 왕망은 더 이상 물러서지 않았다. 서기 9년 정월, 왕망은 한나라를 신나라로 바꾸고 스스로를 '신황제'라 칭하며, 유아 황태자 유영을 정안공으로 폐위시켰다. 한고조에서 한평제까지, 서한은 열두 명의 황제와 214년의 역사를 끝으로 멸망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