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명인 이야기

송렴의 기묘한 계책, 한 번에 세 가지를 얻다

명나라 홍무 초년, 강남 지역은 홍수와 침수로 인해 큰 재난을 겪고 있었다. 특히 자싱(嘉兴) 일대는 운하 제방이 자주 무너져 가장 심각한 피해를 입었고, 백성들은 하늘을 향해 탄식하며 고통스러워했다. 태조 황제 주원장은 연이어 재난 상황을 보고하는 주장을 받았다. 국고에는 어느 정도 은자가 있었지만, 이를 전국에 분배하려 해도 마른 하늘에 소나기 맞는 격이었다. 결국 그는 눈을 감고 말했다. "천조는 막 건국되었고 국고는 텅 비어 있으니,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일은 세금을 감면하는 것뿐, 구호 곡물을 배정할 수는 없다!"

배우기를 싫증내지 않고 방법을 중시하다—쉬 테리

쉬 테리는 1877년에 태어났다. 청년 시절부터 그는 독서를 매우 좋아하며, 책을 읽는 것이 "인생의 이치를 밝히고 사회의 이치를 밝힐 수 있다"고 생각했다. 18세 때 생계를 위해 의사가 되는 것과 사숙(私塾)의 스승이 되는 것 사이에서 후자를 선택하여, 이로써 "평생 가르치는 일"의 길을 걷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낮에는 학생들에게 책을 가르치지만, 밤에는 스스로 스승을 찾아가 공부를 해야 했다. 왜냐하면 "스스로 이치를 깨달아야만 학생들에게 그 깨달은 이치를 가르칠 수 있기" 때문이다.

채륜이 종이를 만든 이야기

점 더 좋아졌다. 채론의 이름도 점점 더 유명해졌다. 종이를 사려는 사람들이 끊임없이 찾아왔고, 채론과 그 일행들이 일심으로 노력해도 사람들의需求를 충족하지 못했다. 그는 이런 상황을 보고 조수를 보내어 각자 종이 공장을 세우고 학도들을 양성하게 했고, 더 많은 사람들이 이 기술을 배우게 했다.

경제학자 마오위쉬

마오위쉬는 현재 중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경제학자 중 한 명이자 중국 민간 경제학계의 주요 대표 인물이다. 개혁개방 30주년을 맞아 공헌이 가장 큰 10명의 경제학자 중 한 명으로 선정되었으며, "현대 중국에서 도덕적 수양과 양심이 가장 뛰어난 경제학자"로 평가받았다. 이론 연구에서부터 사회 실천에 이르기까지 그의 날카로운 사상과 실천은 중국의 경제 개혁에 있어 기여한 바가 크다. 최근 몇 년 사이 그는 "18억 무(畝) 경작지 적색선"을 비판하고, "경제적 적격 주택(경적방)"의 폐지를 제안하며, "공공임대주택 무변소(無廁所)론"을 내놓는 등 차원 높은 발언들을 하며 반복적으로 사회적 논쟁을 일으켰다.

위안룽핑, 벼의 아버지

1960년, 희귀한 천재지변과 인화로 인해 심각한 식량 기근이 닥쳤다. 누렇게 뜬 얼굴에 부은 병자들이 하나둘 쓰러져 갔고… 위안룽핑의 다섯 자 길이 몸도 직접 굶주림의 고통을 경험했다.위안룽핑은 혹독한 현실을 목격하고 잠 못 이루며 뒤척였다. 그는 옛 사회를 떠올렸다. 당시 국민들은 지배 계급의 착취와 억압을 받았으며, 전쟁의 고통 속에서 옷과 음식이 부족하고 떠돌며 살았다. 오늘날 국민들이 주인으로서 살아가고 있지만 여전히 굶주림의 위협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별을 바라보는 소년 — 장형의 이야기

장형(78~139)은 자가 평자이며, 남양 서아(지금의 허난성 남양 현 석교진) 사람이다. 그는 중국 동한 시대 위대한 천문학자로서 우리나라 천문학 발전에 지울 수 없는 공헌을 하였으며, 수학·지리·회화 및 문학 등 여러 분야에서도 뛰어난 재능과 넓은 학식을 보여주었다.

물리학자 전삼강

전삼강은 1913년 10월 16일 저장성 소흥에서 태어났다. 그는 중국 원자력 사업의 주요 창시자로, '중국 원자력 과학의 아버지', '중국 두 개의 폭탄과 한 개의 인공위성의 아버지'라고 불린다.전삼강의 아버지 전현동은 근대 중국의 유명한 언어문자학자였다. 전삼강은 어릴 때 아버지를 따라 베이징에서 살았으며, 근대 일류 교육가인 채원배 선생이 교장으로 있던 공덕중학교에 다녔다.

물리학자 왕건창

"내 옆에 있던 동료가 쓰러졌고, 그의 피가 내 옷에 튀었다."1926년 3월 12일, 일본 군함이 중국 내륙 수로에 침범하여 대구코우(大沽口)에 주둔하던 중국군의 저지에 부딪혔다. 영국, 미국, 일본 등 8개 국가는所谓 '대구 사건'을 핑계로 중국 정부에 최후통첩을 보냈다. 이에 분노한 베이징 고등교육기관의 교수와 학생들은 사오천 명 정도 모여 집회와 시위를 벌였다. 그러나 애국심 없는 단기서이 정부는 발포 명령을 내렸고, 일행의 청원 학생들이 정부 청사 앞에서 살해당했다.

수학자 조충지

조충지(429-500)의 할아버지는 조창으로, 송나라 시절 궁정 건축을 관리하는 관직을 맡았다. 조충지는 이러한 가정에서 자라 어릴 때부터 많은 책을 읽었으며, 사람들은 그를 학식이 풍부한 청년이라고 칭찬했다. 그는 특히 수학 연구를 좋아했고, 천문력법(天文曆法) 연구에도 관심이 많아 태양과 별들의 운행 상태를 끊임없이 관측하며 상세한 기록을 남겼다.

성공이란 최고의 나 자신이 되는 것이다

어린 시절 부모님이 이혼한 한 소년이 있었다. 그는 어머니와 함께 살았다. 경제적으로 넉넉하지 않아 가족 다섯 명이 바람이 사방에서 들어오는 나무판자로 지은 오두막에 빽빽이 들어찼고, '이층 침대'에서 잤으며, 간장에 비벼 먹는 밥을 천하의 최고 미식으로 여겼다. 그는 어릴 때부터 외모가 평범했고, 말이 적고 고립된 성격이었다. 친구들은 모두 그가 더럽고 못생겼다고 생각해 함께 노는 것을 꺼렸다. 학교에 다니기 시작한 후에는 친구들의 조롱과 모욕을 더욱 심하게 받았고, '아빠 없는 들개'라고 불리기도 했다. 그는 자신이 이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이라고 생각한 적도 있었다. 학생 시절 그는 매우 장난기 많고 활동적이고 게을렀으며, 성적도 항상 좋지 않았다. 그래서 학부모 회가 열릴 때마다 어머니는 반드시 불려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