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명】
'문장(門牆)'은 스승의 문하를 가리키며, '도리(桃李)'는 후학이나 제자를 비유한다. 타인의 제자를 칭하는 말이다.
【출전】
『논어·자장(論語·子張)』: "부자지장수임(夫子之牆數仞), 부득기문이입(不得其門而入), 불견종묘지미(不見宗廟之美), 백관지부(百官之富). 득기문자혹과의(得其門者或寡矣). 부자지운(夫子之云), 불역의호(不亦宜乎)!"
【해석】
자공(子貢)이 말하기를: "담장을 비유하자면, 우리 집 담장은 어깨 높이에 불과하지만, 스승님의 담장은 여러 길이나 높다. 만약 문을 찾아 들어가지 못하면, 그 안에 있는 종묘의 웅장함과 온갖 관청의 풍부함을 볼 수 없다. 문을 찾아 들어가는 사람은 매우 적다. 숙손무숙(叔孫武叔)이 그런 말을 하는 것도 어찌 그리 이상하겠는가?"
【성어 이야기】
춘추 시대에 공자는 당시의 학문 대가였다. 공자는 사사(私學) 강의의 풍조를 처음으로 개척하고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을 주창했다. 공자는 유가학파의 시조이다. 전해지기에 공자에게는 3천여 명의 제자가 있었고, 그중에서도 학식이 매우 깊은 72명은 '칠십이현(七十二賢)'이라 불렸다. 이 72현 중에 단목사(端木賜)라는 제자가 있었는데, 복성(複姓)은 단목(端木), 자(字)는 자공(子貢)이다. 그는 유가 상인의 시조로, 춘추 말기 위나라(지금의 허난성 하비시 순현) 사람이다. 자공은 공자의 총애를 받는 제자이자 공문십철(孔門十哲) 중 한 명으로, 공문십철 중에서도 언변으로 유명했으며, 입이 발라 말재주가 뛰어나고 토론에 능했다. 또한 실질적인 재능을 갖추고 있어 일 처리에 능통했으며, 노나라와 위나라의 재상직을 지냈다. 또한 상업에도 능해 공자 제자들 중 최고의 부자였다.
한번은 노나라의 대부가 다른 사람 앞에서 공자를 폄하하고 자공을 칭찬했다. 자공이 이 소식을 듣고 매우 분노하여, 바로 집을 비유하며 말했다. "스승님의 담장은 몇 장이나 높아 그 안의 웅장함을 일반인이 볼 수 없지만, 나의 담장은 어깨 높이에 지나지 않아 한눈에 다 들여다보인다." 또한 스승을 해와 달에 비유하며, 스승의 빛은 보통 사람이 따라잡을 수 없다고 말했다.
당시 노나라의 가장 강력한 권신은 양호(陽虎)였다. 그는 원래 계손씨(季孫氏, 계평자·계환자)의 가신으로, 아무런 배경도 없었다. 이후 노나라 내란이 일어나자, 양호는 반란을 진압함으로써 빠르게 노나라의 군사·정치권력을 장악했다. 양호는 비록 일시적으로 노나라 집정자의 자리를 굳히긴 했지만, 삼환(三桓: 노나라의 경대부인 맹손씨·숙손씨·계손씨를 가리킴)이 언젠가 연합하여 자신을 제거할까 두려워했다. 삼환의 세력이 여전히 매우 강했기 때문이다. 결국 양측은 갈등을 빚어 전쟁이 발발했고, 양호는 패배하여 제나라로 망명했으나, 제경공(齊景公)에게도 배척당했다. 양호는 송나라를 거쳐 진나라로 도망쳤다.
양호는 진나라에서 당시 중군좌(中軍佐)를 맡고 있던 조간자(趙簡子) 조양(趙鞅)을 만났다. 조양은 양호를 받아들여 그를 2인자로 임명했다. 어느 날 두 사람이 술을 마시다가, 양호는 자신의 망명 생활을 떠올리며 조양에게 매우 감회 깊게 말했다. "공구(공자)에게는 3천 명의 제자가 있는데, 모두가 다 각자의 분야에서 중추적인 인재가 되었다. 내가 예전에 노나라에서 집정할 때는 내 밑에 제자가 만 명은 아니더라도 오천은 족히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몰락했을 때 이 제자들은 나를 도와주기는커녕 오히려 나를 해쳤다. 내가 가꾼 것은 도리(도와 복숭아 나무)가 아니라 가시덤불뿐이었다!"
【예문】
그는 국가를 위해 수많은 훌륭한 과학기술 인재를 양성하였으니, 문장도리(門牆桃李)라 할 만하다. 수많은 제자들이 국내외의 유명한 학자들과 국가의 중추 인재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