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나라의 정관지치는 국가 경제의 번영과 문화의 발달을 가져왔고, 주변 소수민족들은 이를 매우 동경하여纷纷 사신을 파견해 우호 관계를 맺고, 신하로서 조공을 바쳤다. 많은 소수민족 지도자들이 당나라 왕실과 혼인 동맹을 맺기를 희망하며 이를 영예로 여겼다. 당태종은 국경의 평화와 각 민족 간의 화목한 공존을 확보하기 위해 화친 정책을 수립하고 시행하였다. 예를 들어, 당태종은 동생 헝양공주를 돌궐 처라칸의 아들 아사나 사얼에게 시집보내고, 홍화공주는 투위훈 칸 노허파에게 시집보내어 당나라와 돌궐, 투위훈 사이의 우호 관계를 구축하였다. 당시 서남 지역의 청해-티베트 고원에서는 강력한 토번(bō) 정권이 부상하고 있었다. 그들의 찬보(토번 왕의 칭호) 송첸 감포는 634년에 사신을 장안에 파견하여 당나라와 우호 관계를 맺기를 희망하였다.
송첸 감포는 어릴 때부터 말 타기, 활 쏘기, 검술 등 다양한 무예에 능통했으며, 문화 소양도 높아 시를 지을 줄 알았고, 토번 사람들은 그를 매우 사랑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지 얼마 안 되어 토번 귀족들이 정권을 탈취하려는 반란을 일으켰다. 젊은 송첸 감포는 복잡한 상황을 침착하게 대처하며 뛰어난 지혜와 용기로 곧바로 반란을 진압하였다.
송첸 감포는 사신을 장안에 보내 당나라의 선진 문화를 배우고자 했으며, 동시에 당 왕실에 혼담을 청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당태종은 즉각 응답하지 않았다. 토번 사신은 돌아가서 송첸 감포에게 꾸지람을 들을까 걱정되어 거짓말을 하였고, 이로 인해 토번과 당나라 사이에 갈등이 생겨 몇 차례 전투를 벌인 후 다시 평화 회담을 하게 되었다.
서기 640년, 송첸 감포는 백 명이 넘는 일행을 파견하여 지혜롭고 능력 있는 대논(재상) 루둥찬을 지휘관으로 하여 많은 금은보화를 준비하고 다시 한 번 장안에 가서 혼담을 청하였다.
루둥찬이 당태종의 접견을 받을 때, 송첸 감포가 당나라와 우호 관계를 맺고자 하는 마음을 전달하며, 젊은 왕이 당나라 공주와 결혼하고자 하는 바람을 교묘하게 표현하였다.
당태종은 루둥찬의 말과 행동을 매우 칭찬하였으며, 그를 통해 송첸 감포에 대해 더 깊이 이해하게 되었다. 당태종은 황족의 여성들 중 문화 소양이 높고, 아름답고 온화한 한 여성을 선발하여 "문성공주"라는 칭호를 내리고 송첸 감포에게 시집보내기로 약속하였다.
루둥찬이 구혼 임무를 완수한 것은 정말 쉽지 않은 일이었으며, 오늘날까지도 민간에서는 "오난구혼사(다섯 가지 난제를 푼 구혼 사신)"라는 감동적인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루둥찬이 여러 난제를 성공적으로 풀고 난 후, 마지막으로 당태종은 그에게 2,500명의 아름다운 여인들 사이에서 문성공주를 찾아내라고 요구하였다. 루둥찬은 예리한 눈으로 단번에 위엄 있고 품위 있는 문성공주를 알아보았다.
서기 641년, 당태종은 예부상서이자 강하왕인 이도종을 보내 문성공주를 토번으로 호송하게 하였다. 문성공주와 함께 티베트로 간 사람들은 많은 시녀와 장인, 요리사 등이 있었다. 문성공주의 풍성한 혼수에는 금은보화, 비단과 명주류뿐만 아니라 토번에 부족한 곡물, 채소, 과일 씨앗, 약재, 누에고치 등도 포함되어 있었으며, 유교 경전과 농업, 의학, 천문, 역법, 과학기술 분야의 수많은 서적도 있었다.
토번 사람들은 문성공주가 송첸 감포와 결혼한다는 소식을 듣고, 길을 따라 선물과 교통수단을 준비하여 맞이하고 배웅하였다. 송첸 감포는 당나라의 예법에 따라 토번의 수도 라싸(당시 루오쉐)에서 백해(현재의 칭하이성 오릉호)까지 가서 문성공주를 직접 맞이하였으며, 그곳에서 성대한 결혼식을 거행하였다. 그는 이도종과 만날 때 사위로서 후배의 예를 갖추어 존경을 표하였다.
이후 송첸 감포는 문성공주를 루오쉐로 데리고 돌아갔다. 그해 티베트력 4월 15일, 루오쉐의 백성들은 마치 큰 축제를 맞이하듯 노래하고 춤을 추며 문성공주를 도시로 맞이하였다.
송첸 감포는 문성공주를 매우 아꼈으며, 당나라 건축 양식에 따라 루오쉐에 문성공주 전용 궁전을 지었다. 오늘날까지도 라싸의 대소사와 포탈라궁에는 송첸 감포와 문성공주의 동상이 모셔져 있다.
송첸 감포가 서기 650년에 서거한 후, 문성공주는 한족과 티베트족 사이의 문화 교류와 우호 관계 증진을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였다. 당시 인도에서 불교를 배우기 위해 간 당나라 승려들은 대부분 토번을 경유하였고, 일부 고승들은 문성공주로부터 정성 어린 접대를 받기도 하였다. 문성공주는 토번에서 약 40년간 살며 티베트족 경제 발전에 기여하였다. 그녀는 수행원들에게 현지 백성들에게 농사 지을 방법을 전수하게 하였으며, 직접 청稞(고지대 보리) 등 곡물의 시범 재배를 지도하였다. 또한 당나라에 뛰어난 장인들을 파견해 토번 사람들의 건설을 도와달라고 요청하였다. 문성공주가 티베트로 간 이후 당나라와 토번의 문화 교류는 크게 강화되었으며, 그녀는 민족 간 우의의 상징이 되어 지금까지도 현지인들에 의해 깊이 그리워되고 있다.
송첸 감포 이후 몇 명의 찬보들도 당나라와의 우호 관계를 계속 유지하였다. 서기 710년, 당중종은 금성공주를 토번 찬보에게 시집보냈다. 서기 729년, 토번 찬보는 사신을 파견하여 당현종을 만나 당나라와 하나의 가족이 되기를 원하며, 천하 백성이 영원히 평화로운 삶을 누기를 바란다고 전하며 한족과 티베트족의 우호적인 감정과 소망을 표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