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양은 유수의 성장지일 뿐 아니라 발원지이기도 하다. 여기서부터 유수는 동한 왕조를 건립하였다. 조양에서 유수는 황족의 일원이자 관가의 자제에서 백정(백의 평민)으로 전락하는 과정을 겪으며 인생의 신산한 고충을 충분히 맛보았고, 세상 물정을 모르던 소년에서 신중하고 성실하며 부지런하고 검소하며 뛰어난 안목을 가진 청년으로 성장했으며, 마침내 세상을 놀라게 하고 시대를 풍류하는 위대한 역사 인물로 성장하였다. 이 뜨거운 땅 위에서 유수가 남긴 이야기와 고향에 대한 깊은 애정은 수천 년 동안 사람들 사이에서 아름다운 이야기로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조양에서 성장하다**
유수는 서한 황족에 속하며, 문사 전적에 상세한 기록이 있다. 『동관한기(東觀漢記)·제기일(帝紀一)』에는 “세조 광무제는 고조의 아홉 대 손으로, 문경(文景)의 계통을 이었다.”고 하였고, 『후한서(後漢書)·광무제기』에는 “세조 광무제 유수(諱秀) 자는 문숙(文叔)이며, 난양(南陽) 재양(蔡陽) 사람으로 고조의 아홉 대 손이다.”고 기록하고 있다. 유수가 한고조, 문제, 경제의 후손임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조양과 깊은 인연을 맺게 되었는가? 『후한서』는 이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원제(元帝) 초원(初元) 4년에 난양의 백수향(白水鄕)으로 옮겨 봉해졌으나 여전히 충릉(舂陵)을 나라 이름으로 삼고, 종제인 거록도위(鉅鹿都尉) 회(回)와 더불어 종족들과 함께 거처를 옮겨 살았다.” 이로써 유수의 가문이 그의 조부 대에 이미 백수향에 도착했음을 알 수 있다. 관련 부문의 연구에 따르면, 서한 말기 조양 지역에는 네 개의 현이 설치되어 있었는데, 북쪽에 호양현(湖陽縣), 북서쪽에 급양현(棘陽縣), 동쪽에 복양현(復陽縣), 남서쪽에 재양현(蔡陽縣)이 있었다. 백수향의 위치에 대해 『수경주(水經注)』는 “광무제의 옛 집터는 성 남동쪽 40리에 있는 백수촌이며, 또 황촌(皇村)이라 한다.”고 기록하고 있으며, 이현(李賢)이 『후한서』에 주석을 달며 “광무제의 옛 집터는 현재의 조양현 남동쪽에 있고, 집터 남쪽 2리에 백수가 있다.”고 하였다. 명나라 정덕(正德) 2년, 하남도(河南道) 어사(御史) 원사(袁仕)와 산서도(山西道) 어사 이방용(李幫用)이 황촌사(皇村寺) 비석을 세우면서 비문에 “황촌은 조양 남동쪽 사십 리에 위치하며, 성룡(聖龍)이 좌측을 감싸고, 향수담(響水潭)이 우측에 있으며, 군산(群山)이 앞을 막고, 백수가 뒤를 에워싼다.”고 기술했다. 이 위치에 근거하면, 충릉 백수향은 현재 조양시 오점진(吳店鎭)에 해당한다.
사료에 따르면, 서한 애제 건평 원년(기원전 6년), 유수는 진류군(陳留郡) 제양현(濟陽縣)(현재의 허난성 난카오현 북동부)에서 태어났으며, 당시 그의 아버지 유친(劉欽)이 제양현령을 지냈다. 유수가 태어난 시대는 모순이 많고 불안정한 시대였다. 9세 때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유수 형제자매는 고아가 되어 생계가 막막해졌고, 결국 고향인 조양 충릉 백수촌으로 돌아가 삼촌 유량(劉良)의 보호를 받아야 했다. “광무는 아홉 살에 고아가 되어 삼촌 양에게 양육되었다.”
조양 백수촌에서 유수는 거의 20년간 생활했다. 그곳에서 그는 종족과 향린들과 함께 해가 뜨면 일하고 해가 지면 쉬었으며, 서로 돕고 사랑하며 “기꺼이 베풀고 사람을 사랑”하고 “농사에 부지런”했다. 또한 그는 경영에도 능했는데, 매년 여름과 가을의 바쁜 농사철이 지난 후 농한기를 이용해 당나귀를 몰고 곡물 등 농산물을 신야(新野), 난양으로 운반하여 팔아 수익을 늘렸다. 왕망의 천봉(天鳳) 연간에 유수는 당시 전국의 정치·문화 중심지인 장안에 가서 학문을 배우기 위해 태학(太學)에 들어가 중대부(中大夫) 허자위(許子威)를 스승으로 모시고 『서경(書經)』을 전문적으로 공부했다. 그러나 그는 단 한 가지 경전에만 얽매이지 않고 폭넓게 학문을 탐구했다. 천하가 평정되지 않고 전쟁이 빈번했던 시대에도 그는 여가가 생기면 유교 경전과 문학을 배우고 토론하는 데 힘썼으며, “경학에 박식하고, 정치와 문장에 뛰어나며, 전대에 비할 데 없었다.” 장안에서 그는 눈을 크게 열었고, 정신을 단련하였으며, 시사와 정치에 매우 관심을 가졌다. “조정의 정책이 내려올 때마다 반드시 먼저 알게 되었고, 동숙생들에게 해설해주었다.” (『동관한기』). 부지런히 배우고 깊이 생각하며 폭넓게 사회와 접촉한 것은 유수가 정치적으로 점차 성숙해지는 데 기여했다. 이후 가정 형편이 어려워져 유수는 학업을 중단하고 조양으로 돌아와 익숙한 경자유학(耕讀生活)을 하게 되었다.
현재 오점진 지역 내에는 여전히 황촌 유적과 충릉 고성 유적이 보존되어 있다. 황촌 유적은 현재 오점진 백수촌 옆에 위치하며, 조양 시정부는 여기에 황촌 유적 전시관을 건립하였다. 충릉 고성 유적은 현재 오점진 충릉촌에 위치하며, 서한 충릉후국(舂陵侯國), 동한 장릉현(章陵縣), 삼국 의양군(義陽郡), 남북조 안창현(安昌縣), 수나라 개황(開皇) 연간 충릉현의 치소(治所)였던 옛 성터이다. 조양에서 동한 개국 황제 유수가 나왔음을 기념하기 위해 명나라 만력(萬曆) 연간에 당시 사람들이 성 서쪽 관문에 비석을 하나 세워 “한 세조 광무제 고향(漢世祖光武帝故里)”이라고 새겼다. 또한 만력 연간에 조양 지현(知縣) 장정신(張靖臣)은 조양에서 서한 경시제(更始帝) 유현(劉玄)과 동한 광무제 유수라는 두 황제가 나왔음을 기념하기 위해 성 서쪽 내관대(內觀臺)에 “고제향(古帝鄕)” 비석을 하나 세웠다. 이 두 비석은 모두 조양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조양에서 발원하다**
조양은 유수의 성장지일 뿐 아니라 그의 발원지이기도 하다. 여기서 나간 유수는 동한 왕조를 건립하고 “광무중흥(光武中興)”을 이루어냈다.
사료에 따르면, 충릉 백수촌에 살던 유수 형제자매는 비록 황족이었으나 직계 계보에서 멀어져 실상은 백정이었다. 왕망이 왕위를 빼앗은 후 유씨를 싫어하여 유씨 일족 모두가 벼슬과 작위를 박탈당했고, 유수의 삼촌이자 소현(蕭縣) 현령이던 유량(劉良)이 파면된 후에도 충릉 백수촌으로 돌아와 농사를 지었다. 유수는 왕망을 매우 미워하며 한나라 유씨 왕조의 천하를 되찾고자 했다.
왕망이 고대를 본받아 개혁을 단행하면서 귀족들의 이익을 해쳤고, 농민과 상인의 세금 부담을 가중시켰으며, 연이은 천재지변으로 백성들이 생업을 잃고 고통받아 천하가 어지러워졌고,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나 왕망의 폭정에 저항했다. 이때 유수는 손님들이 도둑이 되었다는 이유로 연좌되어 “신야로 피신하여 완(宛)에서 곡식을 팔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때로 스물여덟 살이던” 유수는 왕망을 반대하고 한나라를 부활시킬 때가 왔다고 판단하고, 지황(地皇) 3년(기원 22년) 11월 “광무가 마침내 (완에서) 손님들을 거느리고 충릉으로 돌아가” 형 유연(劉演)과 함께 “고조의 위업을 되살리고 만세의 기반을 다지자”는 구호를 내걸고 “충릉 기병(起兵)”을 시작하였다. 유연과 유수 형제는 “충릉 청년들 7~8천 명”을 규합하였는데, 유수의 삼촌 유량, 이복형제 유중(劉仲), 종형 유사(劉賜)와 충릉후의 직계 자손 유지(劉祉) 형제가 “차례로 군대에 합류”하였으며, 신야의 등신(鄧晨)도 손님들을 거느리고 충릉에 합류하였다. 이 기의군은 충릉에서 일어났기 때문에 역사적으로 “충릉병(舂陵兵)”이라 불렸고, 한나라 왕조 부흥을 외쳤기 때문에 “한군(漢軍)”이라 불리기도 하였다. 유수는 당시 기의군의 주요 지도자로서는 아니었으나, 기의를 조직하고 발동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기의군 세력을 확대하기 위해 유연과 유수는 다른 농민군과 연합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들은 왕봉(王鳳)이 이끄는 신시병(新市兵)과 진목(陳牧)이 이끄는 평림병(平林兵)과 연락하여 연합군을 조직하였다. 왕망 통치에 저항한다는 목표가 일치했기 때문에 연합군은 급속히 큰 세력을 형성하였다. “서쪽으로 장거(長聚)를 공격할 때, 광무는 처음에 소를 타고 다녔으며, 신야위(新野尉)를 죽인 후에야 말을 얻었다. 진군하여 당자향(唐子鄕)을 도륙하고, 호양위(湖陽尉)를 죽였다.” 여기서 말하는 장거는 현재 조양의 사장(寺莊)이며, 당자향은 현재 조양 북부 당자산(唐子山) 아래의 태평진(太平鎭)이다. 장거, 당자향, 신야, 호양에서의 승리는 한군이 강력한 왕망 난양 관군을 격파하는 데 기반을 마련하였고, 이후 난양·곤양 대전의 승리와 동한 중흥을 위한 기반을 마련하였다.
**조양에 대한 그리움**
기원 25년, 유수는 황제에 등극하여 한 정권을 재건하였고, 이를 동한이라 한다.
유수가 천하를 평정한 후, 국가와 백성을 이롭게 하고 국력을 강화하는 일련의 정책과 조치를 선포하고 시행하여 국가를 “중흥”의 길로 이끌었다. 바쁘게 국정을 처리하는 와중에도 고향을 잊지 않고 고향에 대한 정을 간직하고 있었다. 사서에 따르면, 유수는 재위 32년 동안 고향 조양에 다섯 차례 돌아갔다. 조양에서 유수는 여러 차례 조상을 제사하고 친족과 향우들을 찾아 위로하고 대접하며 그리움을 표현하였다.
영광을 안고 고향에 돌아온 동시에 유수는 고향에 많은 은혜를 베풀었다. 첫째, 고향의 행정구역을 승격시킨 것이다. 유수는 주요 분열 세력을 소탕하고 전국 통일이 확정된 상황에서 건무(建武) 6년(기원 30년), 자신의 조상 능묘인 장릉(章陵)의 이름을 사용하여 고향 충릉향(舂陵鄕)을 장릉현(章陵縣)으로 승격시키는 칙령을 내렸다. 둘째, 장릉현에 특별한 혜택 정책을 실시한 것이다. 건무 6년 봄, 유수는 칙령을 내려 장릉현의 전세(田租) 및 각종 부역을 면제하였다. 유수는 조양 고향만을 그리워하고 돌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출생지와 어릴 적 성장지에도 깊은 정을 기울였다. 사료에 따르면, 유수는 자신의 출생지 제양현에 대해 세 차례 칙령을 내려 전 현민의 부역을 8년간 면제하였고, 어릴 적 성장지 난둔현(南頓縣)에 대해서는 두 차례 칙령을 내려 전 현민의 전세를 2년간, 부역을 1년간 면제하였다. 위대한 명군 유수가 보여준 고향을 사랑하고 고장을 애착하며 은혜에 보답하려는 전통적인 미덕은 그의 고향 조양에서 오늘날까지 전해져 내려오고 있으며, 앞으로도 대대손손 빛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