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인종의 보살 같은 마음

송인종이라 하면 누구나 잘 알 것이다. '이묘환태자(狸猫換太子)'라는 민간 설화는 송인종의 어머니와 관련된 이야기이며, 포정(包拯)의 침방울이 얼굴에 튀었던 것도 송인종이었다. 소동파(蘇東坡), 소순(蘇洵), 왕안석(王安石), 사마광(司馬光), 구양수(歐陽修), 범중엄(范仲淹) 등 하나같이 중량급 인물들이 모두 송인종 시대의 명신들이었거나, 이 시기에 역사 무대에 등장하였다. 중국의 주요 발명품 중 근대화를 이끈 두 가지 발명품인 활자 인쇄술과 나침반(나침반)도 모두 인종 시대에 등장하였다.

송인종은 천자(天子)로서 극도로 검소하였다. 가정 연회에서도 자주 여러 번 세탁한 옷을 입었으며, 침구는 대개 거친 비단으로 만들었다. 송나라 진사도(陳師道)의 『후산담총(後山談叢)』에 따르면, 한 번은 초가을 무렵 관리가 조개를 바쳤다. 송인종이 물었다. "이게 어디서 왔고, 얼마지?" 답하기를, 조개 하나에 1000전씩, 모두 28개라고 하였다. 송인종은 매우 불쾌해하며 말했다. "朕은 늘 너희에게 사치를 삼가라 경계해왔는데, 젓가락을 들기만 해도 2만 8천 전이 들게 되니,朕은 먹을 수 없다!"

황제는 봉건 사회의 최고 통치자로서 모든 것을 자기 중심으로 생각하는 것이 습관이며, 타인을 배려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그러나 송인종은 그 드문 예외에 속한다. 『동헌필록(東軒筆錄)』에 따르면, 한 번 송인종이 거닐다가 자주 뒤를 돌아보았는데, 수행원들은 황제가 무엇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송인종이 궁전으로 돌아온 후 후궁에게 말했다. "朕은 목이 마르다. 어서 뜨거운 물을 가져오라." 후궁이 이상하게 여겨 물었다. "밖에 있을 때 왜 수행원에게 물을 주도록 하지 않고 목마름을 참으셨습니까?" 송인종이 말했다. "朕이 여러 번 돌아보았지만, 그들이 물주머니(수단)를 준비하는 것을 보지 못했다. 만약朕이 물어보았다면, 반드시 누군가 처벌을 받을 터이니, 목마름을 참다가 돌아와 마시기로 했다." 이렇게 '마음이 따뜻한' 황제는 역사상 두 번째로 찾아보기 힘들 것이다.

송인종은 사상이 개방적이며 포용력이 있었다. 소식(蘇軾)의 동생 소철(蘇轍)이 과거 시험을 볼 때, 대담하게 시험지에 이렇게 썼다. "길에서 들은 바에 의하면, 궁중에는 수천 명의 미인이 있으며, 날마다 춤과 노래, 술로 종일 흥청거린다. 황제께서는 백성들의 고통을 돌보지도 않으시고, 신하들과도 나라를 다스리는 대책을 논의하지 않으신다." 사실 소철의 말은 전부 소문에 불과하여, 현실과 전혀 맞지 않았다. 시험관들은 소철을 벌주려 했으나, 송인종이 이 소식을 듣고는 "朕이 과거를 설치한 것은 원래 직언을 하는 사람을 환영하기 위함이다. 소철이라는 한 학생이 이렇게 당당하게 말할 수 있으니, 특별히 과거 급제를 주어야 한다."라고 말했다. 이에 소철은 오히려 과거에 합격하였다. 만약 청나라 '강건성세(康乾盛世)' 시대였다면, 삼족을 멸족당했을 것이 분명하다.

사상을 억누르기 위해 많은 황제들이 문자옥(文字獄)에 열중하여, 수많은 문인들이 이유 없이 억울하게 죽임을 당하거나 가문이 멸족당하기도 했다. 그러나 송인종은 어떤 문자옥도 일으키지 않았으며, 그가 다스리는 대송 왕조는 매우 개방적이었고, 여론도 비교적 자유로웠다. 예를 들어 당시의 이학자(理學家) 성의(程頤)가 '황제와 함께 천하를 다스리고자 한다'고 공공연히 말하기도 했는데, 이는 청나라였다면 삼족이 멸족당할 일이었지만, 송인종 시대에는 아무 일도 없었다. 주변(朱弁)의 『곡위구문(曲洧舊聞)』에 따르면, 청두의 한 서생이 '검문관을 막고 스택각을 불태우니, 청두는 별천지다'라는 시를 지었다. 누군가 이 서생을 '반란' 혐의로 조정에 고발하였다. 그런데 뜻밖에도 송인종은 가볍게 말했다. "이 늙은이는 그냥 벼슬을 하고 싶을 뿐이다. 벼슬을 못 얻어 반란 시를 지어 분을 풀고자 하는 것이니, 벼슬을 하고 싶다면 그냥 주면 되지." 이에 그 서생은 만호참군(萬戶參軍)이 되고 말았다.

송인종은 자신의 백성에게는 자비롭고, 다른 나라 백성에게도 늘 인애의 마음을 품었다. 한 번은 북방에 다녀온 사신이 고려의 공물이 점점 줄고 있다고 보고하며 군대를 파병하자고 제안하였다. 송인종은 "이는 고려 국왕의 죄일 뿐이다. 지금 군대를 보내면 국왕이 반드시 죽지는 않겠지만, 오히려 무수한 백성들이 죽임을 당할 것이다."라고 말하며 결국 군대를 보내지 않았다.

위태(魏泰)의 『동헌필록(東軒筆錄)』에는 이런 작은 일화가 기록되어 있다. 어느 날 아침, 송인종이 근신(近臣)에게 말했다. "어젯밤朕은 배고파서 잠을 못 이루었고, 구운 양고기를 먹고 싶었다." 근신이 말했다. "폐하께서는 왜 구운 양고기를 내리라고 명을 내리지 않으셨습니까?" 송인종이 말했다. "朕이 들은 바로는, 궁중에서 매번 무언가를 요구하면 외부에서는 이를 제도로 알고,朕이 매일 밤 양을 잡아 구운 양고기를 준비하게 될까 걱정된다. 그러면 살생이 너무 많아질 것이다." 이에 주위 사람들이 만세를 외쳤으며, 이 만세의 함성이 그들의 진심에서 우러난 것임을 믿는다.

시덕조(施德操)의 『북창지록(北窗炙錄)』에 따르면, 어느 날 밤 송인종이 궁중에서 시끄러운 악기 소리와 노래 웃음 소리를 듣고 이상하게 여겨 궁인에게 물었다. "이곳은 어디서 놀고 있는가?" 궁인이 답했다. "이곳은 민간 술집에서 노는 곳입니다. 폐하, 들어보십시오. 밖의 민간은 이렇게 즐겁지만, 우리 궁중은 이토록 쓸쓸하고 쓸쓸하지요." 송인종이 대답했다. "너는 알고 있는가? 바로朕의 궁중이 이렇게 쓸쓸하기에, 밖의 백성들이 이렇게 즐거울 수 있는 것이다. 만약朕의 궁중이 밖처럼 즐거웠다면, 민간은 쓸쓸하고 쓸쓸할 것이다." 민간의 즐거움이 황궁을 능가하는 것이 바로 송인종이다. '백성을 근본으로 삼고', '백성을 자식처럼 사랑한다'는 말에 송인종은 실로 당연한 자격이 있다.

1063년, 재위 41년 만에 송인종이 세상을 떠났다. 이 소식이 전해지자, 시민들은 자발적으로 장사를 멈추고 애도하였으며, 종이 돈을 태우는 연기가 낙양성 위로 가득하여 하늘이 어두워질 지경이었다. 주장여(周長孺)라는 관리가 지금의 쓰촨 지역에 갔을 때, 산골짜기에서 물을 길어오는 여성들도 종이로 만든 상복 모자를 쓰고 황제의 승하를 애도하는 것을 보았다.

중국 역사상 송인종처럼 최고 권력을 가졌으면서도 신중하게 권력을 행사한 경우는 극히 드물다. 비록 송인종이 철혈적이지도 않고 강력한 권력자도 아니었지만, 그가 다스리는 대송 왕조는 백성들이 평안하고 안락하였으며, 경제도 번영하였다. 세계 최초의 지폐인 '교자(交子)'도 이때 등장하였다. 누군가 말했듯이, "인종은 백 가지 일은 못해도, 황제 노릇은 잘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