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에 바빠 한가할 틈이 없다 (日不暇給)

【병음】
rì bù xiá jǐ

【해석】
'협(暇)': 한가한 시간, '급(给)': 충분하다. 일들이 매우 많아 시간이 부족하고, 다 마칠 여유가 없다는 뜻이다.

【출전】
《한서(漢書)·고제기하(高帝紀下)》: "비록 날마다 한가할 틈이 없지만, 그 규모와 틀은 광대하고 원대하였다."

해석: 이처럼 유방은 하루하루가 바빠서 한가할 틈조차 없었지만, 그가 이루고자 했던 위대한 체제와 규모에는 아직 한참 미치지 못했다.

【성어 이야기】
기원전 202년, 유방은 항우를 격파하고 황제의 자리에 올라 한나라를 건국하였으며, 역사적으로 한고조(漢高祖)라 불린다.

유방이 처음 황제가 되었을 때, 조정이 직접 통치하는 영토는 겨우 15개 군에 불과했고, 나머지 땅은 공을 세운 제후왕들에게 봉해 주었다. 이는 거의 전국시대의 할거(割據) 상태를 되살린 것과 같았다. 그러나 당시로서는 이러한 조치가 불가피했다. 그렇지 않으면 이들이 항우를 공격하도록 할 수 없었고, 한 황제에 대한 명목상의 승인을 얻을 수도 없었으며, 결국 통일과 평화를 이룰 수 없었기 때문이다.

안정된 환경을 마련하기 위해 다양한 제도와 규칙을 세워야 했다. 진나라의 모든 제도는 이미 폐지되었고, 새로운 제도는 아직 마련되지 않았다. 이에 유방은 승상 소하(蕭何)에게 국가의 근본 법전을 만들어 전국민이 따를 수 있는 법적 기준을 마련하도록 명령했다. 소하는 현리(縣吏)에서부터 고관이 될 때까지 민정(民政)에 밝았다. 일찍이 반란군이 진나라 수도 함양에 들어갔을 때, 그는 진나라의 법률과 도서를 거두어 전국의 산천과 요충지, 군현의 호적 인구 등을 파악하고 있었다. 그는 명령을 받은 후 당시 사회 상황을 바탕으로 진나라의 제도를 참조하여 『구장률(九章律)』을 제정하였다.

군사 분야에도 법령이 필요했다. 한신(韓信)은 탁월한 군사가로, 유방이 항우를 물리치는 전쟁에서 큰 공을 세웠기 때문에, 유방은 그에게 군법을 제정하도록 하였다. 대신 장창(張蒼)은 유명한 역산가(曆算家)였는데, 유방은 그에게 역법(曆法), 길이, 무게, 부피 등 측량에 관한 제도를 만들게 하였다. 또한 유방은 박사 관직인 숙손통(叔孫通)에게 예의제도를 정하도록 하여, 임금과 신하 사이에 정해진 예절이 생기게 하고 모두가 이를 따르도록 하였다.

유방은 어릴 때 별로 책을 읽지 않았고, 황제가 된 후에도 독서하는 습관이 없었다. 태중대부(太中大夫)인 노가(陸賈)는 독서와 문장을 좋아하며, 자주 유방 앞에서 『시경(詩經)』과 『서경(書經)』을 이야기하였다. 유방은 이미 일상의 정무 처리로 매우 바빴고, 시간도 부족한데다 자주 듣다 보니 지겨워졌다. 어느 날 그는 노가를 꾸짖으며 말했다. "나는 말 위에서 천하를 얻었는데, 『시』와 『서』가 무슨 상관이 있느냐!" 노가는 침착하게 대답했다. "폐하는 말 위에서 천하를 얻었지만, 말 위에서 천하를 다스릴 수 있겠습니까? 옛날부터 성군(聖君)과 현왕(賢王)들은 모두 천하를 다스리는 방법을 연구했습니다. 문치와 무치를 어느 하나도 소홀히 해서는 안 되며, 그래야 나라가 공고해집니다."

유방은 노가의 말이 이치에 맞다고 생각하고 말했다. "좋다. 네가 책을 알고 도리를 아는 사람이니, 진나라가 어찌하여 망했는지, 내가 어찌하여 천하를 얻었는지, 그리고 고금의 왕조가 흥망성쇠한 모든 중요한 사건들을 다 써서 내게 보여다오." 곧 노가는 12편의 글을 지었다. 유방이 읽고 나서 매우 깊은 깨달음을 얻었고, 이 글들을 모아 『신어(新語)』라는 책으로 엮었다.

유방은 또 맹세의 맹약을 세우고, 공신들에게 봉작하는 문서를 주사(朱砂)로 쓰게 하여 철권(鐵券)으로 만들고, 이를 금속으로 만든 상자와 석실에 넣어 종묘(宗廟) 속에 보관하게 하여 영원히 보존하도록 하였다.

이처럼 유방은 하루하루가 바빠서 한가할 틈조차 없었지만, 그가 이루고자 했던 위대한 체제와 규모에는 아직 한참 미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