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숭환의 녕원성 대첩

위충현의 환관 일당이 명나라 조정을 어지럽히고 있을 무렵, 후금의 칸 누르하치는 계속하여 요동 지방의 명나라 군대를 공격하고 있었다. 사얼후 전투 이후, 명나라는 노장인 웅정필을 파견하여 요동 지역의 군사 작전을 지휘하게 했다. 웅정필은 능력 있는 장군이었으나, 광녕(현재 랴오닝성 베이진) 순무였던 왕화진은 웅정필의 출관(산해관 밖으로 나감)이 자신의 입지를 위협한다고 여겨, 온갖 수단을 동원해 웅정필의 지휘를 방해했다. 1622년, 누르하치가 광녕을 공격하자 왕화진은 스스로 관내로 도망쳤고, 웅정필은 더 이상 저지할 수 없어 일부 백성을 보호한 채 산해관 안쪽으로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광녕이 함락되자 명나라는 상황을 가리지 않고 웅정필과 왕화진을 동시에 감옥에 가두었다. 위충현은 기회를 틈타 웅정필에게서 은자 사만 냥을 갈취하며 사형을 면제해주겠다고 요구했다. 웅정필은 성실한 인물로서 그런 돈을 가질 리 없었기에 당연히 거부했고, 이에 환관 세력은 웅정필을 군량 탕진 혐의로 모함하여 처형하였다.

명나라가 웅정필을 처형한 후, 누구를 보내 후금 군대에 맞설 것인가? 병부(兵部)는 매우 급해하고 있었다. 바로 그때, 주사(主事, 관직명) 원숭환이 갑자기 실종되었다. 관청 사람들이 그의 집에 찾아갔지만 가족조차도 그의 행방을 몰랐다. 며칠 후 원숭환이야말로 돌아왔는데, 나라 형세가 위급하다고 판단하고 혼자 말을 타고 산해관 밖으로 현장 정찰을 다녀온 것이었다.

원숭환은 관내외의 형세를 꼼꼼히 조사한 후 병부상서 손승종에게 보고하며 말했다. "저에게 병사와 군량을 주신다면, 제가 반드시 요동을 지켜낼 수 있습니다."

후금의 공세에 겁먹고 있던 조정 대신들은 원숭환이 자진해서 나선 것을 듣고 모두 찬성하여 시험삼아 맡기기로 결정했다. 명희종은 원숭환에게 군량으로 은자 이십만 냥을 승인해주며, 관외 명군을 통솔하도록 명령했다.

관외 지역은 수년간의 전쟁으로 황폐하기 그지없었고, 곳곳에 전사한 병사들의 시체가 널브러져 있었으며, 얼음과 눈이 덮인 혹한과 야수들까지 출몰하는 등 환경이 극도로 열악했다. 원숭환이 관외로 나간 후 소수의 수행 병사들을 거느리고 황야를 밤새 말을 달려 새벽 무렵에는 녕원(현재 랴오닝성 싱청)의 전둔에 도착했다. 그는 이곳에서 난민들을 수용하고 성곽과 진지를 구축했다. 현지 장병들은 원숭환의 용기와 인내심에 모두 경탄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원숭환은 관외에서 실사를 마친 후, 군대를 파견하여 녕원에 주둔시키고 방어 진지를 구축하기로 결심하였고, 이를 조정에 보고하자마자 곧바로 손승종의 지지를 얻었다.

원숭환은 녕원에 높이 삼장이척, 너비 이장의 성벽을 쌓고 각종 화기를 비롯한 대포를 배치했다. 손승종 또한 녕원 근처의 금주(錦州), 송산(松山) 등지에 여러 부대를 파견하여 녕원을 지원하게 했다.

원숭환은 엄격한 군기로 군민의 존경을 받았다. 관외 각지의 상인들이 녕원의 방어가 튼튼하다는 소식을 듣고 사방에서 몰려들었고, 요동의 위급했던 국면은 급속도로 반전되었다.

손승종과 원숭환이 요동 방어에 성과를 거두고 있을 무렵, 위충현의 의심을 샀다. 위충현은 환관 세력을 시켜 손승종의 험담을 하게 했고, 결국 손승종은 직위에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위충현은 손승종을 몰아낸 후 동료인 고제(高第)를 요동 군사 지휘관으로 임명했다. 고제란 무능하고 평범한 인물로, 산해관에 도착하자마자 장군들을 불러 모여 회의를 열며 후금 군대가 너무 강해 관외에서는 방어가 불가능하다며 모든 명군 부대를 산해관 내부로 철수시킬 것을 명령했다.

원숭환은 철수에 단호히 반대하며 말했다. "우리가 어렵사리 관외에 발을 붙였는데 어떻게 쉽게 포기할 수 있겠습니까?"

고제는 원숭환에게 녕원을 버릴 것을 강요했다. 원숭환은 분노하며 말했다. "내 책임은 녕원을 지키는 것이며, 죽는 한이 있어도 그 자리에서 죽을 것이며, 절대 후퇴하지 않겠습니다."

고제는 원숭환을 설득하지 못하자 어쩔 수 없이 원숭환이 일부 명군을 이끌고 녕원에 남는 것을 허락했으나, 다른 관외 지역의 명군에게는 제한 시간 내에 관내로 철수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 명령은 매우 갑작스럽게 떨어졌고, 각지의 수비군은 전혀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아 서둘러 철수하면서 관외에 저장된 십여만 단의 군량을 모두 버리고 왔다.

누르하치는 명나라 군대의 패주하는 초라한 모습을 보고 명나라를 쉽게 격파할 수 있다고 판단하고, 1626년 직접 13만 대군을 이끌고 요하를 건너 녕원을 공격했다.

그 무렵, 녕원 주변 거점에 주둔하던 명군은 이미 모두 철수한 상태였고, 녕원성에는 일만 명이 넘는 병사만 남아 있어 극도로 고립된 상태였다. 그러나 원숭환은 결코 기죽지 않았다. 그는 손가락을 깨물어 '금나라를 물리치고 목숨을 바치겠다'는 피로 쓴 맹세문을 장병들에게 보이며 격려의 연설을 했다. 장병들은 감동하여 열혈이 솟구쳤고, 모두 원 장군을 따라 녕원을 마지막까지 지키겠다고 다짐했다.

이어 원숭환은 성밖 주민들에게 식량과 물건을 챙겨 모두 성안으로 들어오도록 명령하고, 민가를 불태워 후금군이 도착해도 먹을 것도, 숨을 곳도 없게 만들었다. 성안 관리들에게는 군량 공급을 맡기는 자, 내통자를 수사하는 자 등 역할을 분담시켰다. 또 산해관의 명군 수비장에게 편지를 보내 녕원에서 관내로 도망쳐 오는 장병이 있다면 현장에서 즉결 처형하라고 지시했다. 이러한 명령들이 내려지자 녕원 성내의 사람들은 마음을 다잡았고, 오로지 성을 지키고 적을 물리치는 것 외엔 다른 생각이 없었다.

약 이십여 일 후, 누르하치는 후금군을 이끌고 기세등등하게 녕원성 아래에 도착했다. 많은 후금 병사들이 뗏매를 머리 위에 들고 명나라의 화살과 돌, 포탄을 무릅쓰며 맹렬히 성을 공격했다. 명군은 용감하게 저항했지만, 후금군은 쓰러진 자리를 곧바로 다른 자가 메웠다. 이 위급한 순간, 원숭환은 미리 준비해 둔 대포를 사용하라고 명령했다. 포성이 울리는 순간 불꽃이 치솟으며 후금 병사들이 살점이 흩날리는 참상을 겪었고, 살아남은 병사들도 어쩔 수 없이 후퇴해야 했다.

다음 날, 누르하치는 직접 전장을 지휘하며 대규모 병력을 집중해 성을 공격했다. 원숭환은 성루의 망루에 올라 차분하게 후금군의 움직임을 감시했다. 후금군이 성벽 바로 근처까지 접근할 때까지 기다린 후, 비로소 포병들에게 적군이 밀집한 곳을 조준해 포격하라고 명령했다. 이 포격으로 후금군은 더욱 큰 피해를 입었고, 전열 후방에서 지휘하던 누르하치 역시 중상을 입어 어쩔 수 없이 철수 명령을 내려야 했다.

원숭환은 적의 철수 소식을 듣고 곧바로 승세를 이용해 성 밖으로 돌격하여 30리까지 추격한 후 승리의 기세로 돌아왔다.

누르하치는 중상을 입고 선양으로 돌아와 부하들에게 말했다. "내가 스물다섯 살 이후로 전쟁마다 승리하고, 공격하는 곳마다 함락시켰는데, 작은 녕원성 하나를 함락시키지 못할 줄이야." 그는 분함과 실의에 빠졌고, 상처도 점점 악화되어 며칠 뒤 세상을 떠났다. 그의 여덟 번째 아들 홍타이지가 후금의 칸으로 그를 계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