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갱의 수도 이전

상탕이 상나라를 건국했을 때, 최초의 수도는 박(亳, 음 bó, 현재의 허난성 상추)에 있었다. 이후 300년 동안 수도는 총 다섯 차례 옮겨졌다. 이는 왕족 내부에서 왕위를 두고 끊임없이 다투며 내란이 빈번했기 때문이며, 더불어 황하 하류 지역에서 자주 범람하는 홍수 피해도 큰 원인이었다. 한 번은 큰 물이 나 수도 전체가 물에 잠기자 어쩔 수 없이 이전해야 했다.

상탕 이후로 스무 명의 왕을 거쳐 왕위가 판갱(盤庚)에게로 이어졌다. 판갱은 능력 있는 군주였다. 당시 불안정한 사회 상황을 개선하기 위해 그는 다시 한번 수도를 옮기기로 결심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귀족들은 안락을 탐해 이전을 원치 않았다. 일부 세력 있는 귀족들은 평민들을 선동하여 반대 운동을 벌였고, 상황은 심각하게 악화되었다.

판갱은 강력한 반대 세력에 직면했지만 수도 이전의 결심을 굽히지 않았다. 그는 반대하는 귀족들을 불러내 차분히 설득했다. "내가 너희에게 이사를 요구하는 것은 나라를 안정시키기 위함이다. 너희는 내 고충을 이해하지 못할 뿐 아니라, 무의미한 혼란을 일으키고 있다. 내 뜻을 바꾸게 하려는 것은 불가능하다."

판갱이 끝까지 수도 이전을 고집하며 반대 세력을 무너뜨리자, 마침내 평민들과 노예들을 이끌고 황하를 건너 은(殷, 현재의 허난성 안양 소툰촌)으로 옮겼다. 그곳에서 상나라의 정치를 정비하여 쇠퇴하던 상나라가 부흥하는 국면을 맞이했고, 이후 200여 년간 수도를 옮기지 않았다. 그래서 상나라는 은상(殷商) 또는 은조(殷朝)라고도 불린다.

그때부터 3000년이 넘는 긴 세월이 흐른 후, 상나라의 수도는 이미 폐허가 되어 있었다. 근대에 들어 안양 소툰촌 일대에서 대량의 고대 유물이 발굴되었고, 이곳이 과거 상나라 수도의 유적이었다는 것이 확인되었으며, 이를 '은허(殷墟)'라고 부르게 되었다.

은허에서 발굴된 유물들 중에는 거북 등껍데기(거북갑)와 동물의 뼈가 10만 조각 이상 있는데, 이 거북갑과 뼈들에는 알아보기 힘든 문자들이 새겨져 있다. 고고학자들의 연구를 통해 비로소 이러한 문자들을 해독할 수 있었다. 원래 상나라의 지배 계층은 귀신과 신령을 매우 미신적으로 숭배했다. 제사나 사냥, 출정을 할 때마다 거북갑과 동물의 뼈를 사용해 길흉을 점쳤다. 점치고 난 후에는 당시의 상황과 점복 결과를 글자로 거북갑과 뼈에 새겼다. 이 문자들은 오늘날의 문자와 큰 차이가 있었고, 나중에 이를 '갑골문(甲骨文)'이라 불렀다. 우리가 현재 사용하는 한자는 바로 갑골문에서 진화한 것이다.

은허 발굴 유물에서는 많은 수의 청동기 그릇과 무기들도 발견되었으며, 종류가 다양하고 제작이 매우 정교했다. '사모무(司母戊)'라는 이름의 큰 정(鼎)은 무게가 875킬로그램, 높이가 130센티미터가 넘으며, 정 위에는 화려한 무늬가 새겨져 있다. 이렇게 거대한 청동기는 은상 시대에 청동을 제련하는 기술과 예술 수준이 매우 높았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동시에 이처럼 거대하고 정교한 정을 만들기 위해 얼마나 많은 노예들의 피와 땀이 배어 있었는지 상상할 수 있다!

고고학자들은 또한 은허에서 은상 시대 노예주들의 무덤도 발굴했다. 안양 무관촌에 있는 한 상나라 왕의 대형 무덤에서는 보석과 옥 같은 사치스러운 묘제품 외에도 많은 노예들이 생매장되어 제물로 죽임을 당한 흔적이 발견되었다. 대형 무덤 옆의 묘도(墓道)에는 한쪽에는 머리 없는 시신이 쌓여 있고, 다른 쪽에는 머리뼈들이 줄지어 놓여 있었다. 갑골문 기록에 따르면, 그들은 조상에게 제사를 지낼 때 노예들을 대량으로 도살하여 제물로 바쳤으며, 최대 2600명 이상을 한 번에 희생시킨 적도 있었다. 이는 당시 노예주들이 노예들을 잔혹하게 학대한 증거이다.

은허에서 출토된 갑골문을 통해 우리는 은상 시대의 사회 상황을 비교적 확실하게 확인할 수 있다. 따라서 중국의 문자로 기록된 가장 오래된 역사가 바로 상나라부터 시작된다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