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성어는 『사기(史記)·위기무안후열전(魏其武安侯列傳)』에 나온다. "무안후가 조정을 마치고 나와 지거문(止車門)에 이르러, 한안국(韓安國) 어사대부를 불러 자신의 수레에 타게 하며 노하여 말하기를, '장유(長孺)와 함께 이 늙은 대머리 노인 하나를 처리하는데, 어찌하여 서서양단(首鼠兩端)하느냐?'"
노반(魯班)은 성은 공수(公輸), 이름은 반(般)이라고 하며, 전국시대 노나라 사람으로 노반(魯般)이라고도 불린다. 정교한 기구를 만들기에 능한 명장으로 '교인(巧人)'이라 불렸다. 민간에서는 오랫동안 목수들의 시조로 숭배되어 왔다. 누가 감히 노반 앞에서 도끼 사용 기술을 자랑하겠는가? 즉, 큰 전문가 앞에서 자신의 능력을 과시하려는, 지나치게 비굴하지 못한 어리석은 행동을 '노반문전 농대부(魯班門前弄大斧)'라 하며, 줄여서 '반문농부(班門弄斧)'라 한다. 속담에서 말하는 '관공(關公) 앞에서 대도(大刀)를 휘두른다'는 표현과 의미가 거의 같다.
전국시대에 제나라에는 안명(顔斶)이라는 고결한 선비가 있었다. 제선왕은 그의 명성을 듣고 궁중에 불러들였다. 안명은 편안한 태도로 궁전 안으로 들어와 전각 앞 계단에 이르렀을 때, 선왕이 자신을 맞이하려 기다리고 있는 것을 보고 발걸음을 멈추고 더 이상 나아가지 않았다. 선왕이 이상하게 여겨 외쳤다. "안명, 이리로 와보오!" 그러나 안명은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고 오히려 선왕을 향해 외쳤다. "대왕, 이리로 오십시오!"
무송은 경양강 근처의 여관에서 술 열여덟 사발을 들이켠 후, 몽둥이를 거꾸로 들고 비틀비틀 걸으며 경양강으로 향하려 했다. 여관 주인이 뒤쫓아 나와 소리쳤다. "가시면 안 됩니다! 가시면 안 됩니다! 요즘 언덕 위에 범이 나타나서 벌써 스물셋에서 서른 명의 목숨을 앗아갔어요!" 무송은 듣고 웃으며 말했다. "날 겁주려 드는군. 정말 있다고 해도 난 무섭지 않아!"
명나라 시대에 전해져 내려오는 유명한 예언서 『소병가』는 명태조 시기의 국사 유기(유백온이라고도 함)가 지었다. 유기는 수리(數理)에 정통했으며, 민간에서는 신선이 하계에 강림하여 태조를 보좌해 위업을 달성했다고 전해진다. 민간 이야기와 문학 작품 속에서 그는 늘 신기묘산(神機妙算)을 부리고, 미래를 예지(豫知)하며, 고금을 통찰할 뿐 아니라 바람과 비를 불러오고 신통이 매우 광대하여 "앞으론 오백 년, 뒤으론 오백 년을 안다"고 하여 신선과 같은 인물로 묘사된다.
송나라 흠종의 정강 2년(서기 1127년), 금나라 병사들이 남쪽으로 쳐들어와 마치 무인의 경지를 누비듯 하며 금방(오늘날의 허난성 개봉)을 신속히 함락시키고 휘종과 흠종 두 황제를 포로로 잡았다. 이를 역사적으로 '정강의 치욕(靖康之恥)'이라 한다. 이 사건 후, 흠종 조환의 동생 조구는 대신들의 도움을 받아 응천부(오늘날의 허난성 상구)에서 황제로 즉위하여 남송 왕조를 세웠다. 이후 수도를 임안(오늘날의 저장성 항저우)으로 옮기고 목숨을 부지하며 금나라가 제기하는 부당한 요구를 모두 수용했다. 송나라 이종 때에는 간신 가사도를 재상으로 임명하면서 조정의 정치가 더욱 혼란에 빠졌다.
전국시대 제나라의 명의(名醫) 변약(扁鵲)은 본래 이름이 진월인(秦越人)이었다. 그는 죽음의 문턱에 있던 많은 사람들을 살렸기 때문에 당시 사람들은 그를 전설 속 황제 시대의 신의(神醫)인 '변약'이라 부르며, 그의 본명은 더 이상 언급하지 않았다. 전설에 따르면, 변약은 선약(仙藥)과 비방(秘方)을 얻어 벽을 사이에 두고도 환자를 치료할 수 있었으며, 환자의 오장육부를 뚜렷이 보고 병이 어디에 있는지 정확히 알 수 있었다.
송 태종(宋太宗)은 즉위 후 창업의 어려움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생활이 매우 검소했으며, 심지어 황궁 안에서 금은으로 장식하는 것도 금지했다. 또한 백성들의 고충을 충분히 이해하고, 항상 백성과 국가를 위하는 마음을 품고 있었다.어느 해 겨울, 날씨가 유난히 춥고, 마치 거위털 같은 큰 눈이 끊임없이 내렸다. 송 태종은 방 안에 있었지만 여전히 여우 가죽 외투를 입고도 온몸이 춥다고 느꼈고, 궁 밖은 더욱 극심한 한파였다. 태종은 불을 피워 놓은 화로를 가져오게 하고 뜨거운 술을 내오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