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시대 제민왕(齊湣王) 때, 연(燕)과 진(秦) 등 여러 나라가 연합하여 제나라를 공격했다. 연나라 장수 악의(樂毅)가 군대를 이끌고 제나라 수도 임저(臨淄)에 침입했고, 제민왕은 위(衛)나라로 도망쳤다. 초(楚)나라는 대장 노치(淖齒)를 보내 군대를 이끌고 제나라를 돕겠다고 했지만, 사실은 진심으로 제나라를 구원하려는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노치는 제민왕을 살해하고 연나라와 함께 제나라의 땅과 보물을 나누어 가졌다. 마침내 전단(田單)이 연군을 크게 무찔러 비로소 제나라의 잃어버린 땅을 되찾을 수 있었다.
한 안제(漢安帝) 재위 기간 동안, 양족(羌族) 부족들이 한나라 국경을 자주 침범했고, 어느 날은 한나라의 무도군(武都郡)을 포위하기까지 했다. 이에 한 안제는 급히 우서(虞詡)를 임명하여 양군(羌軍)과 맞서 싸우도록 했다. 우서는 부하들을 이끌고 밤새 무도군으로 급히 달려갔으나, 진창(陳倉), 효곡(崤谷) 일대에 도착했을 때 수많은 양군의 저지로 인해 전진하지 못했다.
춘추 시대, 진(晉)나라에서 내란이 일어났다. 진헌공(晉獻公)은 시비(讒言)를 믿고 태자 신생(申生)을 죽이고, 신생의 동생 중이(重耳)를 체포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중이는 이 소식을 듣고 진나라를 탈출하여 10여 년간 방랑 생활을 하게 되었다. 그 기간 중, 중이는 한때 초(楚)나라에 머물렀는데, 초성왕(楚成王)은 중이가 장차 큰 업적을 이룰 인물이라 판단하고 국빈(國賓) 대우를 하며 상賓(上賓)처럼 대접했다.
이수(李垂)는 자가 순공(舜工)이며, 산동성 루오청(聊城) 사람으로, 북송(北宋)의 관리였다. 흥평(咸平) 연간에 과거에 급제하여 차례로 저작랑(著作郎), 관각교리(館閣校理) 등의 직책을 맡았다. 그는 세 권의 『도하형승서(導河形勝書)』를 편찬하여 옛 운하를 다스리는 데 유익한 많은 제안을 하였다. 그는 박학다식하고 정직하여 당시 관료 사회의 아첨과 비위 맞추기 같은 속된 풍조를 매우 혐오하였으며, 부패한 풍조에 동조하지 않아 많은 권력자들을 불쾌하게 만들어 오랫동안 중요한 자리에 등용되지 못하였다.
진나라 말기, 초지(楚地)에 계포(季布)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성정이 곧고 정의감이 강하며 남을 돕는 것을 좋아했다. 한번 약속한 일이라면 아무리 어려운 상황이라도 반드시 방법을 찾아서 해냈다. 그래서 모두에게 칭찬을 받았다.
초한지쟁(楚漢之爭) 당시, 계포는 항우(項羽)의 부하로, 여러 차례 책략을 세워 유방(劉邦)의 군대를 패배시킨 적이 있었다. 항우가 패배한 후, 계포는 홀로 중병을 뚫고 도망쳐 천애를 떠도는 생활을 시작했다. 황제가 된 유방은 이 일을 떠올릴 때마다 분노를 금치 못하고, 계포를 통촉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자로(子路)는 춘추 시대 말기 노나라(魯國) 사람으로, 공자의 제자들 가운데 정치에 능했다고 유명한 인물이다. 공자의 총애를 받는 제자였으며, 성격이 직설적이고 용감하며, 특히 효성이 지극했다. 그러나 어릴 적 집안이 매우 가난하여 늘 조잡한 곡식과 들나물로 생활을 이어갔다. 어느 날, 늙은 부모님이 밥을 먹고 싶다고 하셨지만 집에는 쌀 한 톨도 없었다. 어떻게 해야 할까? 자로는 산을 몇 번 넘어서 친척 집에 가서 조금이라도 쌀을 빌리면 부모님의 소원을 이룰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于是 어린 자로는 산과 골짜기를 넘어 십여 리 길을 걸어 친척 집에서 작은 자루의 쌀을 지고 돌아왔다. 부모님이 향기로운 밥을 드시는 모습을 보고, 자로는 피로를 잊었다. 이웃 사람들은 모두 자로를 용감하고 효심 깊은 훌륭한 아이라고 칭찬했다.
춘추 시대, 진헌공(晉獻公)은 애첩 여기(驪姬)의 부추김을 받아 태자 신생(申生)을 죽이고, 공자 중이(重耳)와 이오(夷吾)를 각각 적국(狄國)과 양국(梁國)으로 도망치게 했다. 이후 진헌공이 죽자, 이오는 진목공(秦穆公)과 제환공(齊桓公)의 도움을 받아 진나라의 군주가 되었다. 그는 중이가 돌아와 왕위를 빼앗길 것을 걱정하여 사람을 보내 중이를 죽이려 했다. 이에 중이는 다시 적국에서 온갖 고초를 겪으며 제나라로 도망쳤다.
송나라 시기, 창사(長沙)에는 경침(景岑)이라는 고승이 있었는데, 호(號)는 소현대사(招賢大師)였다. 그는 불학(佛學)에 조예가 깊어, 늘 각지로 다니며 도를 전하고 경전을 강의했다. 대사의 강의는 깊이 있고도 이해하기 쉬우며, 생생하고 감동적이어서 청중들은 늘 깊이 감명을 받았다.
1977년, 황두두(黄豆豆)는 저장성 온저우(温州)의 외딴 산간 마을에서 태어났다. 그가 초등학교 2학년 때, 한 인민해방군 문공단이 그의 학교를 위문하며 공연을 했는데, 황두두는 그 순간 매료되었다. 그는 마음속으로 다짐했다. '나는 언젠가 무용가가 되리라.' 그 꿈을 향해, 12살 되던 해 황두두는 상하이 무용학교에 입학하여 민족무용을 배우기 시작했다.
황두두는 키가 매우 작았다. 그와 함께 입학한 열 명이 넘는 동기들은 모두 키도 크고 유연성도 그보다 훨씬 뛰어났다. 친구들은 그를 비웃으며 말했다. "너 같은 키로 춤을 평생 직업으로 삼겠다니? 꿈도 꾸지 마라, 힘만 낭비할 뿐이야!"
리시나의 집은 바다 가까이에 있었고, 마을 사람들은 대대로 어부로 살아왔다. 그는 어릴 때부터 아버지를 따라 바다에 나갔고, 어린 나이에 이미 아버지의 든든한 조수였다. 그런데 최근 들어 그는 제대로 된 일을 하지 않고 사냥에 빠져들었고, 거의无可구제(고칠 수 없을 정도)였다. 이 일로 인해 아버지에게 자주 꾸지람을 들었다.
마을에서 멀지 않은 곳에 험준하고 사람이 잘 가지 않는 작은 산이 있었다. 어른들은 그 산에 야생 멧돼지가 자주 출몰한다고 말했다. 만약 멧돼지를 잡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산에 사는 멧돼지는 그의 마음을 사로잡았고, 그는 운을 시험해보기로 결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