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5일은 우리 중국 연중행사의 하나인 단오절이다.
이 명절은 우리들이 찰밥주머니(쭝쯔)를 싸는 날이다. 해마다 이날이면 많은 집에서 찰밥주머니를 싸며, 수많은 맛과 종류가 다양한 찰밥주머니들이 이 찰밥주머니 향기로운 계절에 우후죽순처럼 등장한다.
단오절 유래에 관해서는 원래부터 설이 분분하다. 어떤 사람들은 5월 5일에 미라강에 투신한 애국시인 굴원을 기리는 날이라고 본다. 또 어떤 사람들은 이 명절이 현대에 들어와선 소독하고 역병을 피하는 날이라고 말한다.
문헌상의 기록과 역대에 전해져 오며 널리 퍼진 많은 단오절 풍속에 따르면, 5월은 '독월(毒月)', '악월(惡月)'로 여겨졌고, 특히 5월 초닷새는 구독(九毒)의 첫날이므로 이날에는 창포와 쑥을 꽂는 것, 웅황주를 마시는 것, 오온사자(五瘟使者)를 제사 지내는 것 등 사악을 물리치고 소독하며 역병을 피하는 특별한 풍습이 많이 전해져 내려왔다.
그 후 또 그 후에 단오절의 의미는 변화를 겪게 되었다. 사람들은 애국시인 굴원의 애국 정신과 숭고한 인격을 기리기 위해 오랫동안 전해져 온 단오절의 본래 의미를 잊어버렸으며, 원래 굴원을 기리기 위한 것이라고 하기 어려운 용선을 타는 것과 찰밥주머니를 싸는 등의 풍속마저도 굴원과 연결지어 생각하게 되었다.
지금 대부분의 사람들은 단오절이 굴원과 관련이 있다고만 기억하지만, 사실 일부 젊은 세대들은 굴원의 이야기에 별다른 인상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 그들이 알고 있는 것은 이것이 찰밥주머니를 먹는 명절일 뿐이다.
단오절에 용선 경주를 한다는 것에 관해 말하자면, 지금은 단오절이 아니더라도 용선 경주 대회가 곳곳에서 열린다. 사악을 물리치고 역병을 피하는 것에서부터 굴원을 기리는 것으로, 단오절의 의미는 큰 변화를 맞이했다.
이 명절의 본래 의미는 해가 거듭될수록 사회의 변화 속에서 점차 '침식'되고 있다.
앞으로 이 명절은 중국인들의 미식 축제가 될 것이다. 옛날의 각서(角黍)인 찰밥주머니 제조에서부터 미래의 수많은 다채로운 찰밥주머니에 이르기까지 많은 지역에서 자기 지역의 특색 있는 음식 문화를 찰밥주머니에 녹여내고 있다.
사실 단오절의 주요 풍속은 용선을 타는 것이다. 용선 경주에 관해서는 문헌 기록이 서기 500년 전 양나라 오균(吳均)의 『속제협기(續齊諧記)』에서 비롯된다. 그 후 많은 기록에서 용선 경주에 관한 문헌 기록을 찾아볼 수 있다.
현존하는 중국 각지의 수천 종의 지방지(方志) 가운데, 용선경주에 관한 기록이 있는 것은 227종에 이른다.
단오절에 용선을 타는 용선경주에 관한 이야기로는 '여러 용선이 일제히 출발하여 굴원을 구하러 간다'는 이야기와 '북을 치고 함성을 지르며 교룡(蛟龍)을 놀라게 해 쫓는다'는 이야기 등이 있다. 이러한 것들은 모두 사람들의 굴원에 대한 연상을 불러일으킨다.
해마다 단오절이 되면 중국 대강남북과 남양 일대의 화교들은 여전히 용선경주를 개최하며 단오절 용선경주를 장려하고 있다.
단오절의 전설
전국시대에 초나라와 진나라가 패권을 다투었다. 시인 굴원은 초왕에게 매우 중용되었으나, 굴원의 주장을 상관대부 진상(靳尚)을 필두로 한 보수파가 반대하며 끊임없이 초회왕 앞에서 굴원을 비방하였다. 이에 초회왕은 점차 굴원을 소원히 하게 되었고, 원대한 포부를 품었던 굴원은 깊은 고통을 느꼈다.
그는 참을 수 없는 우울과 분노를 안고 『리소(離騷)』, 『천문(天問)』 등의 불후의 시편을 지었다.
기원전 229년, 진나라가 초나라의 성 여덟 개를 점령한 데 이어 사신을 보내 초회왕이 진나라에 와서 화의를 논의하라고 청했다. 굴원은 진왕의 음모를 꿰뚫어 보고 목숨을 걸고 궁중에 들어가 그 이익과 해악을 설명하였으나, 초회왕은 듣지 않을 뿐 아니라 오히려 굴원을 영도(郢都)에서 추방해 버렸다. 초회왕은 약속대로 회담에 참석했으나, 진나라에 도착하자마자 감금당하고 말았다. 초회왕은 후회와 걱정이 뒤섞여 우울한 병에 걸렸고, 3년 후에 진나라에서 죽음을 맞이하였다. 초경쇠왕(楚頃衰王) 즉위 후 오래지 않아 진왕이 다시 군대를 보내 초나라를 공격하자, 경쇠왕은 당황하여 수도를 떠났고, 진나라 군대는 영성을 점령하였다. 유배 길에 있던 굴원은 연이어 초회왕의 죽음과 영성 함락이라는 악소식을 접한 후 만감이 교차하여 모든 희망을 잃고 하늘을 우러러 길게 탄식한 후, 빠르게 흐르는汨나강(汨羅江)에 몸을 던졌다.
강 위의 어부들과 강둑의 백성들은 굴원 선생이 강에 투신하여 자결했다는 소식을 듣고 모두 강가로 달려와 굴원의 시신을 애써 건져 올리려 했으며, 각자 찰밥주머니와 계란을 가져와 강에 던졌다. 어떤 의원은 웅황주를 강에 부어 교룡과 수중의 야수들을 기절시켜 굴원 선생의 시신이 해를 입는 것을 막으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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