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처삼해(周處除三害)

서진(西晉) 시대에는 왕개(王愷)와 석숭(石崇)과 같은 극도로 사치스럽고 호화로운 가문의 관료들 외에도, 또 다른 무리의 사족(士族) 관료들이 있었다. 이들은 밥을 배부르게 먹고는 정작 할 일은 하지 않고, 삼삼오오 모여 허풍을 떨며 현실과 동떨어진 터무니없는 괴이한 이야기만 늘어놓았다. 이러한 대화를 '청담(淸談)'이라고 불렀다. 이런 사람들은 대개 명성이 자자하고 지위도 높았다. 이는 당시 사회 풍기의 부패함을 여실히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나 관료들 사이에는 비교적 정직하고 실무에 충실한 사람들도 있었다. 서진 초기의 주처(周處)가 바로 그런 인물이었다. 그가 광한(廣漢, 현재의 쓰촨 광한 북부) 태수로 재임할 때, 현지 관리들은 부패하여 오랫동안 처리되지 않은 사건들이 무려 30년간 방치되어 있었다. 주처가 부임하자마자 모든 오래된 사건들을 성심성의껏 처리해버렸다. 이후 수도로 옮겨 어사중승(御史中丞)이 되었을 때는, 황족 친척이든 누구든 법을 어긴 자는 가리지 않고 대담하게 고발했다.

주처는 원래 동오(東吳) 의흥(義興, 현재의 장쑤성 이싱 현) 출신이었다. 젊은 시절 키가 크고 힘도 보통 젊은이보다 강했다. 아버지는 일찍 돌아가셨고, 어릴 때부터 누구의 통제도 받지 않아 하루 종일 밖을 떠돌며 공부를 하지 않았다. 성격도 거칠고 폭력적이어서 조금만 불만이 생기면 주먹을 휘두르거나, 심지어 칼과 창을 들고 위협하기도 했기 때문에, 의흥 지역 백성들은 모두 그를 두려워했다.

의흥 근처 남산(南山)에는 흰 이마를 가진 맹호가 자주 나타나 백성들과 가축들을 해쳤고, 현지 사냥꾼들도 그것을 제압할 수 없었다.

또한 현지의 장교(長橋) 아래에는 '교(蛟)'라 불리는 악어 같은 물고기가 출몰하며 위협을 가했다. 의흥 사람들은 주처와 남산의 백악호(白額虎), 장교의 대교(大蛟)를 함께 지칭하여 '의흥 삼해(三害)'라 불렀다. 이 '삼해' 중에서 백성들이 가장 골치 아프게 여긴 것은 바로 주처였다.

어느 날, 주처가 밖을 걷다가 사람들이 모두 우울하고 기운 없어하는 것을 보았다. 그는 노인 한 명을 붙잡고 물었다. "올해 풍년인데, 왜 다들 그렇게 근심 가득한 얼굴을 하고 있습니까?"

노인은 짜증을 내며 대답했다. "삼해가 아직 없어지지 않았는데, 어떻게 기뻐할 수 있겠습니까?"

주처는 처음으로 '삼해'라는 말을 듣고, "삼해가 도대체 무엇입니까?" 하고 물었다.

노인이 말했다. "남산의 백악호, 장교의 교, 그리고 당신, 이 셋이 바로 삼해가 아니겠습니까?"

주처는 크게 놀랐다. 마을 사람들이 자신을 호랑이와 악어처럼 큰 해로운 존재로 여기고 있었다는 것을 비로소 깨달은 것이다. 잠시 생각하던 그는 말했다. "좋습니다. 모두가 삼해로 고통받고 있다면, 제가 그들을 없애겠습니다."

다음 날, 주처는 과연 활과 화살을 들고 날카로운 검을 메고 산에 들어가 호랑이를 사냥하러 갔다. 울창한 숲 속 깊이 들어가자, 멀리서 호랑이의 포효가 들리더니 흰 이마의 맹호가 튀어나왔다. 주처는 재빨리 옆으로 피해서 커다란 나무 뒤에 숨은 후 활시위를 당기고 '쏴-' 하는 소리와 함께 맹호의 이마를 꿰뚫어 그 생명을 끊었다.

주처가 산을 내려와 마을 사람들에게 알리자, 사냥꾼들이 산에 올라 죽은 호랑이를 내려왔다. 모두들 기뻐하며 주처를 축하했지만, 주처는 말했다. "서두르지 마세요. 아직 장교의 교가 남아 있습니다."

또 하루가 지난 후, 주처는 몸에 꼭 맞는 옷으로 갈아입고 활과 화살, 칼을 들고 물속으로 뛰어들어 교를 찾으러 갔다. 그 교는 깊은 물속에 숨어 있다가 사람의 접근을 알고 물 밖으로 뛰어올라 물어뜯으려 했다. 그러나 주처는 이미 준비를 마친 상태였고, 교의 몸에 칼을 힘껏 찔러 심한 상처를 입혔다. 교는 중상을 입고 강 하류로 도망쳤다.

주처는 교가 죽지 않은 것을 보고 끈질기게 뒤를 쫓았다. 교가 수면 위로 떠오르면 그도 따라 수면으로 올라갔고, 교가 물속 깊이 가라앉으면 그도 바닥까지 따라 들어갔다. 이렇게 오르락내리락 하며 수십 리 밖까지 추격을 계속했다.

삼일 삼야가 지나도록 주처는 돌아오지 않았다. 사람들은 수군거리며, 이번에 주처와 교가 서로 치명상을 입고 강바닥에서 모두 죽었으리라 여겼다. 원래 사람들이 생각하기에도 주처가 맹호와 교를 죽이는 것만 해도 대단한 일이었는데, 이번엔 '삼해'가 모두 죽은 셈이니 모두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골목길마다 사람들이 이 일을 이야기할 때마다 기쁨이 가득했고, 서로 축하했다.

그러나 넷째 날, 주처가 다치지도 않고 무사히 집으로 돌아왔다. 사람들은 크게 놀랐다. 원래 교가 상처를 입은 후 주처에게 끝까지 추격당해 결국 피를 너무 많이 흘려 움직이지 못하다가, 주처에게 살해된 것이었다.

주처가 집에 돌아와, 자신이 삼일간 집을 비운 사이 사람들이 자신이 죽은 줄 알고 매우 기뻐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 사건을 통해 그는 자신의 일상적인 행동이 사람들에게 얼마나 미움을 받았는지 깊이 깨닫게 되었다.

그는 각오를 다지고 고향을 떠나 오군(吳郡)으로 가서 스승을 찾아 공부를 하기로 결심했다. 당시 오군에는 명성이 높은 두 사람이 있었는데, 하나는 육기(陸機), 또 하나는 육운(陸雲)이었다. 주처가 그들을 찾아갔을 때 육기는 외출한 상태였고, 육운만 집에 있었다.

주처는 육운을 만나, 자신의 개과천선을 결심한 마음을 진심으로 털어놓았다. 그는 말했다. "제가 너무 늦게 깨달아 귀중한 시간을 헛되이 날렸음을 후회합니다. 이제는 뭔가 큰 일을 하려 하는데, 너무 늦은 것이 아닐까 걱정됩니다."

육운은 그를 격려하며 말했다. "낙심하지 마십시오. 이렇게 결심한 이상 앞날은 충분히 희망이 있습니다. 사람은 단지 굳은 뜻이 없을까 두려워할 뿐, 성공하지 못할까 걱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 후 주처는 육기와 육운을 따라 열심히 공부하며 책을 탐독했고, 동시에 자신의 도덕적 수양에도 신경을 썼다. 그의 부지런하고 배우기를 좋아하는 태도는 모두의 칭찬을 받았다. 일 년이 지나자, 주·군(州郡)의 관청에서 그를 불러 관직을 맡기기 시작했고, 동오가 진나라에 멸망당한 후에는 진나라의 고위 관료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