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길조차 정원에 주지 않다 (目不窺園)

【해석】
한가지 일에 정신을 집중하여 열심히 공부함을 비유적으로 표현한 말이다.

【출전】
《한서(漢書)·동중서전(董仲舒傳)》: "소년 시절 『춘추』를 연구하였고, 효경제 때 박사가 되었다. 장막을 내리고 강의를 하니, 제자들은 입학 순서에 따라 서로 가르쳤으며, 어떤 이는 그의 얼굴을 본 적조차 없다. 대체로 3년 동안 정원을 돌아보지 않았으니, 그의 정성스러움이 이 지경이었다."

해석: 동중서는 광천(廣川) 사람이다. 젊은 시절 『춘추』를 연구하였고, 한나라 경제 때 박사가 되었다. 그는 방 안에 장막을 치고, 장막 뒤에 앉아 강의를 하였다. 제자들은 먼저 입문한 자가 후에 입문한 자에게 학문을 전수하였으며, 어떤 학생은 그의 얼굴을 본 적조차 없었다. 동중서는 3년 동안 정원을 한 번도 돌아보지 않을 정도로 학문에 정성과 열의를 다했다.

【성어 이야기】
서한 시기, 유명한 사상가이자 정치가, 교육가인 동중서가 있었다. 광천(지금의 하북성 경현 광천진 대동고장촌) 사람이다. 한나라 경제 때 박사로 재직하며 『공양춘추』를 강의하였다. 한무제 원광 원년(기원전 134년), 한무제가 칙서를 내려 치국 방략을 구하자, 동중서는 유명한 『거현량대책(舉賢良對策)』에서 유가 사상과 당시 사회의 요구를 결합하고, 다른 학파의 이론도 수용하여 유학을 중심으로 하는 새로운 사상 체계를 창립하였다. 이는 한무제의 큰 칭찬을 받았으며, "천인감응(天人感應)", "대일통(大一統)" 이론과 함께 "육예(六藝)의 과목과 공자의 학술에 속하지 않는 모든 학설은 그 길을 끊어 함께 발전하지 못하게 하라", 즉 "백가를 폐하고 유학만을 존중하라(罷黜百家, 獨尊儒術)"는 주장을 체계적으로 제시하였다. 이 주장을 한무제가 받아들여, 유학은 중국 사회의 정통 사상이 되었고, 그 영향은 2000년 이상 지속되었다.

그의 학문은 유가의 종법 사상을 중심으로 하되, 음양오행설을 혼합하여 신권(神權), 군권(君權), 부권(父權), 부권(夫權)을 하나로 연결하여 제정일치의 신학 체계를 형성하였다.

동중서는 젊은 시절 『춘추』를 연구하였다. 그는 방 안에 장막을 치고, 장막 뒤에 앉아 강의를 하였으며, 제자들은 먼저 입문한 자가 후에 입문한 자에게 학문을 전수하였다. 어떤 학생은 그의 얼굴을 본 적조차 없었다. 동중서는 3년 동안 정원을 돌아보지 않을 정도로 학문에 몰두하였다. 그의 행동거지와 예절은 예(禮)에 어긋나는 것은 전혀 행하지 않았으며, 학자들은 모두 그를 스승으로 존경하였다.

동중서는 어릴 때부터 독서를 매우 좋아하였다. 그의 서재는 정원과 가까워 환경이 매우 고요하였다. 그는 이 서재에 홀로 머물며, 사계절 내내 매일 아침 일어나자마자 책을 들고 읽었다. 하인이 자주 일깨워주지 않았다면, 식사하거나 옷을 갈아입는 일까지도 잊어버릴 정도였다. 이렇게 하여 훌쩍 3년이 지나갔다.

어느 날, 봄날의 햇살이 환히 비추는 날, 동중서가 서재 밖으로 나섰다. 서재 옆에 심어진 살구나무를 우연히 스쳐보았는데, 너무 놀라 세 걸음이나 뒤로 물러서며 하인에게 놀란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이 살구나무를 얼마 전에야 심은 줄 알았는데, 어떻게 벌써 꽃이 피고 열매가 맺혔지?"

하인이 대답했다. "주인님, 이 살구나무는 이미 네 해 이상 된 것입니다. 옛말에 '복숭아는 삼년, 살구는 네 해, 배는 다섯 해'라고 하지 않습니까? 올해가 바로 살구나무가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을 때입니다."

동중서는 듣고서 비로소 생각났다. 이 살구나무는 자신이 예전에 직접 심은 것이었고, 그 후 3년이 넘는 세월 동안 나는 정원을 한 번도 바라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