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후 대국들이 패권을 다투던 시대에, 강대국들은 약소국들을 병합하며 영토를 확장했다. 그러나 대국의 군주는 새로 얻은 땅을 공을 세운 대부들에게 봉해줘야 했다. 이로 인해 대부들의 세력이 커졌고, 그들 사이에서도 자주 갈등이 발생했다. 대국 내부의 모순이 심화되면서, 각국은 패권 다툼을 잠시 멈추고 싶어 했다.이러한 이유로 송나라의 대부 상숙(向戍, 음: shù)이 진(晉)과 초(楚) 사이를 오가며 중재자 역할을 했다.
기원전 546년, 진과 초를 비롯한 여러 나라들이 송나라에서 '미병회의(弭兵會議)'(미: 멈추다, 병: 전쟁)를 열었다. 이 회의에서 진나라와 초나라의 대부들이 남북 세력 집단을 대표해 화의를 맺고 동맹을 체결했다. 협약은 제(齊)와 진(秦) 두 강대국을 제외하고, 모든 소국들이 진과 초에 동등하게 조공을 바치기로 했으며, 진과 초가 패권을 나누기로 했다. 이후 50여 년간 큰 전쟁 없이 평화가 유지되었다.초장왕(楚莊王)의 손자인 초평왕(楚平王)이 즉위한 후, 초나라는 점차 쇠퇴했다. 기원전 522년, 초평왕은 원래의 태자인 건(建)을 폐위하려 했다. 당시 태자 건과 그의 스승 오사(伍奢)는 성부(城父, 현재의 허난성 상청현 서쪽)에서 수비 임무를 맡고 있었다. 초평왕은 오사의 반대를 우려해, 먼저 오사를 불러내 태자 건이 모반을 꾀하고 있다고 거짓으로 고발했다.오사는 어떤 일이 있어도 인정하지 않았고, 즉시 옥에 갇혔다.
초평왕은 동시에 태자 건을 암살하려는 자를 파견하면서, 오사에게 그의 두 아들 오상(伍尚)과 오자서(伍子胥)에게 돌아오라고 쓴 편지를 강요해, 함께 제거하려 했다. 장남 오상은 수도 영도(郢都, 현재의 후베이성 장링현 북서쪽, 음: yǐng)로 돌아가 아버지 오사와 함께 초평왕에게 살해되었다. 태자 건은 미리 정보를 입수해 아들 공자 승(公子勝)과 함께 송나라로 도망쳤다.
오사의 또 다른 아들인 오자서도 초나라를 탈출해 송나라로 가 태자 건을 찾았다. 그러나 불행히도 송나라가 내란을 겪고 있어, 오자서는 태자 건과 공자 승을 데리고 정(鄭)나라로 도망쳤다. 그들은 정나라에 복수를 도와달라고 요청했지만, 정나라 군주 정정공(鄭定公)은 이를 거절했다.태자 건은 복수심이 강해, 정나라의 일부 대신들과 결탁해 정정공의 권력을 빼앗으려 했으나, 정정공에게 살해당했다. 오자서는 어쩔 수 없이 공자 승을 데리고 정나라를 탈출해 오(吳)나라(수도는 현재의 장쑤성 쑤저우)로 망명했다.초평왕은 이미 오자서를 체포하라는 현상금을 내걸고, 오자서의 초상화를 초나라 각지의 성문에 게시하고 지방 관리들에게 철저한 수색을 명령했다.
오자서는 공자 승과 함께 정나라를 탈출한 후 낮에는 숨고 밤에는 길을 재촉해 오와 초의 경계에 있는 소관(昭關, 현재의 안후이성 한산현 북쪽)에 도착했다. 관문의 관리들이 수색을 매우 엄격하게 실시했다. 전설에 따르면 오자서는 근심으로 여러 날 밤을 꼬박 새우며 잠을 이루지 못했고, 머리카락마저 새하얗게 변했다. 다행히 그들은 오자서를 동정한 호의적인 사람 동고공(東皋公)을 만나, 그의 집으로 데려가 보호를 받았다. 동고공은 오자서와 외모가 비슷한 친구를 한 명 두고 있었다. 동고공은 그 친구에게 오자서의 분장을 시켜 관문을 통과하게 했다. 관문 수비대는 가짜 오자서를 체포했고, 진짜 오자서는 머리카락이 모두 희어지고 외모가 변해 수비대가 알아보지 못해, 무사히 관문을 통과할 수 있었다.
오자서가 소관을 통과한 후, 추격병이 뒤따를까 두려워 급히 앞으로 달렸다. 앞에는 커다란 강이 길을 막고 있었다. 오자서가 급한 마음을 안고 있을 때, 강 위에서 한 노파가 작은 배를 타고 다가와 오자서를 강 건너로 건너게 해 주었다.강을 건넌 후, 오자서는 감격해 자신의 옆에 차고 있던 보검을 노파에게 건네며 말했다. "이 검은 초왕이 내 조부에게 내린 것이며, 백 냥의 금과 맞먹는 가치가 있습니다. 지금 당신께 드리니, 제 마음을 조금이나마 전달하고자 합니다."노파는 말했다. "초왕은 당신을 체포하려고 오만 석의 곡식을 현상금으로 내걸었고, 고발자에게는 대부의 작위를 약속했습니다. 저는 그토록 큰 현상금과 작위도 탐내지 않는데, 어찌 당신의 이 검을 원하겠습니까?"오자서는 서둘러 노파에게 사과하며 검을 거두어 다시 몸에 차고, 작별 인사를 하고 떠났다.오자서는 오나라에 도착했을 때, 오나라의 공자 광(光)이 왕위를 찬탈하려 하고 있었다. 오자서의 도움으로 공자 광은 오왕 요(吳王僚, 음: liáo)를 살해하고 스스로 왕이 되었다. 이것이 곧 오왕 합려(吳王闔閭, 음: hé lǘ)이다.
오왕 합려가 즉위한 후, 오자서를 대부로 봉해 국가의 중요한 일을 보좌하게 했으며, 또 한 명의 장군 손무(孫武)를 등용했는데, 이는 전쟁에 뛰어난 명장이었다. 오왕은 오자서와 손무를 중심으로 군대를 정비하고, 먼저 주변의 몇몇 소국들을 병합했다.기원전 506년, 오왕 합려는 손무를 대장으로, 오자서를 부장으로 삼고 직접 대군을 이끌고 초나라를 공격했다. 연전연승하며 초군을 완전히 무찌르고, 수도 영도(郢都)까지 진격했다.
그 무렵 초평왕은 이미 죽었고, 그의 아들 초소왕(楚昭王)도 도망쳤다. 오자서는 초평왕을 몹시 미워하여 그의 무덤을 파헤치고, 시신을 파내어 사정없이 채찍질했다.오군은 영도를 점령했다. 초나라 신하 신포서(申包胥)는 진(秦)나라로 도망쳐 구원을 요청했다. 진애공(秦哀公)은 처음에는 군대 파견을 거부했다. 신포서는 진나라 궁전 밖에서 떠나지 않고, 낮과 밤을 가리지 않고 통곡하며 무려 7일 7야를 울었다. 마침내 진애공은 감동되어 말했다. "초나라가 비록 잔혹하고 도리에 어긋나지만, 이렇게 충성스러운 신하가 있는데, 어찌 그들의 나라가 망하는 것을 가만히 보고만 있겠는가!"진애공은 군대를 파견해 초나라를 구원하고 오군을 격파했다. 오왕 합려는 비로소 군대를 철수해 귀국했다.오왕 합려가 수도로 돌아와, 최고의 공로를 손무에게 돌렸다. 그러나 손무는 벼슬을 하기를 원치 않고 고향으로 돌아가 은거했다. 그가 남긴 『손자병법(孫子兵法)』은 중국 역사상 가장 오래된 탁월한 군사 전략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