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 시대의 뛰어난 군사 전략가 오기

전국 초기, 일곱 강국이 서로 경쟁하며 전쟁이 잦았고, 오기가 살던 위나라는 상대적으로 약해 열강들의 표적이 되었습니다.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났지만 큰 포부를 지닌 오기는 분열되고 고통받는 조국을 위해 돈을 아끼지 않고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며 큰 업적을 이루려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명성을 얻지 못했고 가산을 모두 소진하여 고향 사람들로부터 조롱과 비난을 받았습니다. 화가 난 그는 위나라를 떠나 노나라로 유학을 떠납니다.

자기섭취적인 원숭이

어느 날, 작은 원숭이가 여름이 너무 더워서 숨도 쉴 수 없을 정도로 느꼈습니다. 그래서 그 원숭이는 집에서 멀리 떨어진 작은 연못 옆으로 걸어가서 시원하게 찬물로 목욕을 하고 싶었습니다. 갑자기 그 원숭이는 연못 옆에 많은 사탕수수 묘가 자라고 있음을 발견했고, 원숭이는 매우 호기심을 느꼈습니다. 그가 생각하기에 만약 자기 집에도 사탕수수가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렇게 되면 집에서 사탕수수를 먹으면 더위를 식힐 수 있을 것이고, 이렇게 여기까지 와서 찬물로 목욕을 할 필요도 없을 것이라고요.

입이 달고 배에 칼이 있다

이 속담은 『자치통감·당기·현종 천보 원년』에 나오는데, "이임보가 재상이 되었을 때... 특히 문학에 능한 선비들을 미워하여, 겉으로는 친절하게 대해주며 달콤한 말로 유혹하지만 속으로는 음모를 꾸며 그들을 해쳤다. 세상 사람들이 이임보를 가리켜 '입에는 꿀이 있고 배에는 칼이 있다'고 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전쟁에 미쳐 나라를 쇠약하게 하다

후기 동오(東吳)의 명장 육항(陸抗)은 스무 살에 건무교위(建武校尉)로 임명되어 아버지 육손(陸遜)이 남긴 5천 명의 부하들을 이끌게 되었다. 264년, 손호(孫皓)가 동오의 국군이 되었을 때, 38세의 육항은 진군대장군(鎮軍大將軍)을 맡았다. 당시 동오의 조정은 매우 부패했다. 손호는 음탕하고 잔혹하여 후궁의 궁녀만 수천 명에 달했으며 민간에서 약탈을 일삼았고, 얼굴 껍질을 벗기거나 눈을 뚫는 등 가혹한 형벌로 마음대로 사람을 죽였다. 육항은 손호의 이러한 행태에 매우 불만을 품고 여러 차례 상소를 올려, 밖으로는 국방을 강화하고 안으로는 정치를 개선하여 국력을 강화할 것을 간언하였다. 그는 한 번의 상소에서 현재 시급히 해야 할 일을 무려 16가지나 열거하기도 했다. 그러나 손호는 그의 제안을 일체 받아들이지 않았다.

벽돌을 던져 옥을 불러온다

이 성어는 송나라 석도원(釋道原)의 『경덕전등록(景德傳燈錄)』 권10, 조주동원종심선사(趙州東院從諗禪師)에서 유래한다. "대중이 저녁에 선문답을 하자 스님이 말씀하시기를 '오늘 밤에 내 말을 이해하는 사람이 있으면 나서 보이라.' 하셨다. 그때 한 스님이 나와 예를 올렸다. 종심(諗)이 말하기를 '지금까지 벽돌을 던져 옥을 불러왔는데, 오히려 기자 하나를 불러왔다.'고 하였다."

비단주머니 속의 묘책 (錦囊妙計)

형주를 유비가 차지하자, 동오의 대장 주유는 형주를 되찾기 위해 온 힘을 기울였다. 그는 유비의 부인이 막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듣고, 손권의 동생을 유비에게 시집보내 유비가 오나라에 입적(入贅)하도록 한 뒤, 그를 감옥에 가두고 형주를 되찾는 데 인질로 삼는 계책을 꾸몄다. 제갈량은 이미 이 계략을 꿰뚫어 보고, 유비를 따라 혼사를 치르러 가는 조운에게 세 개의 비단주머니에 담긴 묘책을 전달했다.

장구직입 (長驅直入)

서기 219년, 조조는 전략적 요지인 형주를 장악하기 위해 유비와 이 일대에서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유비의 대장 관우는 중병을 동원해 상양을 포위했고, 조조의 사촌 조인은 상양과 인접한 번성에서 고립되어 매우 어려운 처지에 놓였다.그 해 7월, 조조는 호위장군 우금을 파견해 조인을 지원하게 했다. 얼마 후, 번성 일대에 폭우가 계속 내려 한수가 범람했다. 관우는 기회를 틈타 물길을 유도해 조조군을 침수시켰고, 결과적으로 우금의 군대는 전멸하여 항복할 수밖에 없었다.

호랑이를 산에 돌려보내다 (縱虎歸山)

조조가 친히 대군을 이끌고 여포를 격파한 후, 유비는 조조를 따라 수도 허창으로 갔다. 조조는 겉으로는 유비를 매우 존중하는 척했지만, 실제로는 매우 의심스러워하며 자주 사람을 보내 유비의 움직임을 살폈다. 그 무렵, 조조에게 강제로 허창으로 끌려온 한 헌제는 비밀리에 밀칙을 내려 사람들을 조직하여 조조를 제거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강 건너 불 보듯 하다 (隔岸觀火)

서기 202년, 원소(袁紹)가 병으로 쓰러져 일어나지 못하고 곧 죽고 말았다. 그의 세 아들은 곧바로 권력 다툼을 시작했다. 맏아들은 배제되었고, 권력은 둘째 아들이 장악했으며, 막내 아들은 이 결정을 지지했다. 당연히 맏아들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고, 이로 인해 원가(袁家) 형제들 사이에 내분이 시작되었다.

연통을 굽고 장작을 옮긴다 (曲突徙薪)

화광(霍光)은 자가 자맹(子孟)이며, 서한 중기의 권신이다. 한무제(漢武帝)가 임종할 때, 화광은 유지를 받들어 한소제(漢昭帝)를 보필하였다. 한소제가 죽은 후, 화광은 창의왕 유학(劉賀)을 황제로 세웠다가 곧 한선제(漢宣帝)를 즉위시켰다. 화광은 20여 년간 집정하며 한소제와 한선제 두 황제를 보좌하였고, 한나라에 큰 공을 세워 박로후(博陸侯)에 봉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