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탕이 상나라를 건국했을 때, 최초의 수도는 박(亳, 음 bó, 현재의 허난성 상추)에 있었다. 이후 300년 동안 수도는 총 다섯 차례 옮겨졌다. 이는 왕족 내부에서 왕위를 두고 끊임없이 다투며 내란이 빈번했기 때문이며, 더불어 황하 하류 지역에서 자주 범람하는 홍수 피해도 큰 원인이었다. 한 번은 큰 물이 나 수도 전체가 물에 잠기자 어쩔 수 없이 이전해야 했다.
명나라 가경 연간, 섬주에는 가세가 근검한 선비 리원정이 있었는데, 그의 아내 조소월과 사이가 매우 좋았다. 리원정은 고된 공부를 하며 언젠가 과거에서 장원을 꿈꿨고, 조소월은 부지런하고 현명하여 남편의 공부를 위해 낮과 밤을 가리지 않고 실을 잣고 천을 짜며 검소하게 생활했다.
동한 시대에 반초는 형 반고를 도와 『한서(漢書)』를 함께 편찬했다. 그러나 그는 한 남자의 포부가 종이와 붓에만 국한되어서는 안 된다고 여겼기에 문관의 길을 버리고 무관이 되어 흉노와의 전투에 참가했다. 그의 강인하고 결단력 있는 성격은 전장에서 끊임없이 공을 세우게 했다.
고대 시절, 천지가 막연하고 우주가 황량하여 백성들은 바다 물이 침범하고 범람하는 고통을 겪고 있었다. 요(堯)가 다스릴 때, 그는 대우(大禹)의 아버지 간(鯀)을 보내 물을 다스리게 하였다. 그러나 간은 범람하는 물을 만나면 제방을 쌓고, 물이 나면 댐을 쌓는 식으로 주로 막는 방법을 썼는데, 그 결과 오히려 홍수가 점점 더 심해졌다.
서한 시기, 유명한 사상가이자 정치가, 교육가인 동중서가 있었다. 광천(지금의 하북성 경현 광천진 대동고장촌) 사람이다. 한나라 경제 때 박사로 재직하며 『공양춘추』를 강의하였다. 한무제 원광 원년(기원전 134년), 한무제가 칙서를 내려 치국 방략을 구하자, 동중서는 유명한 『거현량대책(舉賢良對策)』에서 유가 사상과 당시 사회의 요구를 결합하고, 다른 학파의 이론도 수용하여 유학을 중심으로 하는 새로운 사상 체계를 창립하였다.
춘추전국시대, 초나라의 유명한 문학가 송옥(宋玉)은 자가 자원(子淵)이며, 중국 고대 10대 미남자 중 한 명으로 꼽힌다. 송옥은 노장 사상을 매우 숭상하였으며, 전국시대 옌지(지금의 후베이성 이청) 출신으로 송나라 공족의 후예이자 초나라 문인이었다. 중국 고대 4대 미남자 중 한 명으로, 굴원 이후를 이은 제자로 태어났으며, 초경상왕을 모셨다.
방통(龐統)은 자가 사원(士元)이며, 병추(鳳雛)라는 별호를 가진 인물로, 한나라 시기 형주 상양(지금의 후베이 상양) 출신의 동한 말기 유명한 책사이다. 어릴 적 방통은 성정이 소박했고, 겉보기에는 그리 영리해 보이지 않았다. 그 당시 영천의 사마휘는 청아한 성품을 지니고 인물을 알아보는 데 능했다. 방통이 스무 살 되던 해에 그를 뵙기 위해 찾아갔다. 사마휘는 뽕나무 위에 앉아 누에를 먹일 뽕잎을 따고 있었고, 방통은 나무 아래에 앉아 서로 낮부터 밤까지 대화를 나누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