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운창구(白雲蒼狗)

당나라 시기, 두보라는 유명한 시인이 있었다. 자는 자미(子美)이며, 스스로를 소릉야로(少陵野老)라 불렀다. 당나라의 위대한 사실주의 시인으로, 이백과 함께 '이두(李杜)'라 불린다. 허난 성 공현에서 태어났고, 고향은 후베이 성 샹양이다. 나중의 시인 이상은(李商隱)과 두목(杜牧), 즉 '소이두(小李杜)'와 구분하기 위해 두보와 이백은 다시 '대이두(大李杜)'라 불리기도 하며, 두보는 흔히 '노두(老杜)'라고도 불린다.

분정항례(分庭抗禮)

춘추 시대, 노나라에는 공자(孔子)라 불리는 사람이 있었다. 성은 자(子), 씨는 공(孔), 이름은 구(丘), 자는 중니(仲尼). 공자는 유가 학파의 창시자이다. 그는 사사(私學) 강의의 풍조를 열고 인(仁), 의(義), 예(禮), 지(智), 신(信)을 장려했다. 제자들이 3천 명이나 있었고, 그중 현명한 인물이 72명이다.

천하제일의 다툼: 제고제와 왕승천의 붓 대결

남제(南齊) 고제 소도성(蕭道成)이 재위할 당시, 궁중에서는 특별한 서예 대회가 열렸다. 대회에 참여한 한쪽은 바로 당시의 황제 소도성이었다. 본래 금위군 장수였던 소도성은 어쩌다 서예에 푹 빠지게 되었는지 모를 일이다.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부지런히 연습하여, 마침내 즉위하여 황제가 되었을 무렵에는 훌륭한 글씨를 쓸 수 있게 되었다.

암향소영(暗香疏影)

북송 시대에 임포라는 이름의 유명한 은사(隱士)가 있었다. 자는 군복(君復)이며, 한족으로 절강성 대리 황현촌 출신이다(또는 항저우 전당이라고도 한다). 어릴 때부터 부지런히 공부하여 경서와 역사, 제자백가를 두루 통달했다. 기록에 따르면 그는 성정이 고고하고 독립적이며, 평온한 삶을 좋아하고 영예와 이익을 추구하지 않았다.

청나라 세종 옹정제, '정음서관(正音書館)'을 설치하다

1728년, 청나라 세종 옹정제는 전국적으로 북경 관화(官話)를 보급하기 위해 '정음서관(正音書館)'을 설립했다. 그는 복건(福建)과 광동(廣東) 두 성에 한민족의 공통어(옛날에 '관화'라 불렀음)를 보급할 것을 명령하고, "거인(擧人), 생원(生員), 공감(貢監), 동생(童生) 중 관화를 능숙히 하지 못하는 자는 시험에 응시하지 못하게 한다"고 규정했다. 즉, 책을 읽는 사람이 관화를 듣고 이해하지 못하거나 말하지 못하면 과거 시험에 응시할 수 없다는 의미이다.

수문제 양견의 반부패 특별 전략

양견(541-604)은 한족으로써 홍농군 화음(현재의 산시성 화음현) 출신으로 수나라의 개국 황제이며, 한나라 태위 양진의 14세손이다. 재위 기간 동안 수백 년간 심각하게 분열된 중국을 성공적으로 통일하였으며, 선진적인 관리 선발 제도를 개척하고 문화와 경제를 발전시켜 중국을 번영의 나라로 만들었다.

문성공주가 티베트로 간 이야기

당나라의 정관지치는 국가 경제의 번영과 문화의 발달을 가져왔고, 주변 소수민족들은 이를 매우 동경하여纷纷 사신을 파견해 우호 관계를 맺고, 신하로서 조공을 바쳤다. 많은 소수민족 지도자들이 당나라 왕실과 혼인 동맹을 맺기를 희망하며 이를 영예로 여겼다. 당태종은 국경의 평화와 각 민족 간의 화목한 공존을 확보하기 위해 화친 정책을 수립하고 시행하였다.

무측천, 서경업을 평정하다

무후(武后)는 마치 회전등처럼 태자를 바꾸고 황제를 바꾸며, 궁극적으로는 자신이 황제가 되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그녀는 자신으로부터 다섯 대 전의 조상들을 모두 추봉(追封)하였고, 고향에 사묘(祠廟)를 세우며 외가의 친척들을 모두 중요한 관직에 임명했다. 또한 자신을 반대하던 서경업(徐敬业), 낙빈왕(骆宾王) 등의 관직을 모두 파직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