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인종이라 하면 누구나 잘 알 것이다. '이묘환태자(狸猫換太子)'라는 민간 설화는 송인종의 어머니와 관련된 이야기이며, 포정(包拯)의 침방울이 얼굴에 튀었던 것도 송인종이었다. 소동파(蘇東坡), 소순(蘇洵), 왕안석(王安石), 사마광(司馬光), 구양수(歐陽修), 범중엄(范仲淹) 등 하나같이 중량급 인물들이 모두 송인종 시대의 명신들이었거나, 이 시기에 역사 무대에 등장하였다.
조양은 유수의 성장지일 뿐 아니라 발원지이기도 하다. 여기서부터 유수는 동한 왕조를 건립하였다. 조양에서 유수는 황족의 일원이자 관가의 자제에서 백정(백의 평민)으로 전락하는 과정을 겪으며 인생의 신산한 고충을 충분히 맛보았고, 세상 물정을 모르던 소년에서 신중하고 성실하며 부지런하고 검소하며 뛰어난 안목을 가진 청년으로 성장했으며, 마침내 세상을 놀라게 하고 시대를 풍류하는 위대한 역사 인물로 성장하였다.
한성제의 어머니인 왕정군 황후태후에게는 여덟 명의 형제가 있었다. 둘째 형제 왕만의 둘째 아들이 바로 왕망이었다. 일부 대신들이 왕망을 극찬하자, 한성제는 그를 신도후에 봉하고, 이후 대사마로 삼아 조정의 실권을 쥐어 주었다. 왕망은 천하의 인재를 적극적으로 영입하였고, 근거리와 원거리의 유명한 선비들이 줄지어 그를 찾아왔다.
제후 대국들이 패권을 다투는 투쟁 속에서, 대국들은 소국들을 병합하며 땅을 넓혔다. 그러나 대국의 제후들은 새로 얻은 땅을 공을 세운 대부들에게 봉건으로 나누어 주지 않을 수 없었다. 이로 인해 대부들의 세력이 커졌고, 그들 사이에서도 끊임없이 갈등이 발생했다. 대국 내부의 모순은 날로 심화되어, 모두 패권 다툼의 전쟁을 잠시 멈추고 싶어 했다.
왕망의 주력군대는 이미 소멸되었고, 주요 거점은 장안과 낙양이라는 두 도시만 남아 있었다. 홍농(현재의 허난성에 위치) 군의 수장 왕헌은 아예 한나라 군에 투항했고, 많은 호강 세력들도 왕헌을 따라 장안을 공격했다. 그들은 도시 안팎에 사방에 불을 질렀다. 왕망은 예복을 입고 단도를 들고 전전에 앉아, 60만 근의 금과 다른 보물을 지키며 마지막 저항을 하고 있었다.
염전(짚신)을 신고 조정에 나아가 일을 보고, 용포에는 보따리를 들었다. 23년 동안 황제를 하면서 궁전을 지은 적도 없고, 정원을 수리한 적도 없으며, 수레나 의장도 늘린 적이 없고, 심지어 개나 말 한 마리도 늘린 적이 없다. 여러 차례 명을 내려 지방 제후국들이 희귀하고 귀한 보물을 바치는 것을 금지했다. 자신을 위해 미리 지은 능묘조차도 간소하게 하라고 요구했다.
사마천의 『사기·고조본기』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유방이 천하를 차지한 경험을 정리하며 말하기를, "...帳幄(帳과 幕) 안에서 계책을 세우고 천 리 밖에서 승패를 결정하는 일에는 나는 자방(자량)만 못하다. 나라를 안정시키고 백성을 보호하며 군량을 공급하고 군량 수송로를 끊기지 않게 하는 일에는 나는 소하만 못하다. 백만 대군을 이끌고 싸우면 반드시 이기고 공격하면 반드시 점령하는 일에는 나는 한신만 못하다. 이 세 사람은 모두 뛰어난 인재이다.
제후 대국들이 패권을 다투던 시대에, 강대국들은 약소국들을 병합하며 영토를 확장했다. 그러나 대국의 군주는 새로 얻은 땅을 공을 세운 대부들에게 봉해줘야 했다. 이로 인해 대부들의 세력이 커졌고, 그들 사이에서도 자주 갈등이 발생했다. 대국 내부의 모순이 심화되면서, 각국은 패권 다툼을 잠시 멈추고 싶어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