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기묘산의 유기

명나라 시대에 전해져 내려오는 유명한 예언서 『소병가』는 명태조 시기의 국사 유기(유백온이라고도 함)가 지었다. 유기는 수리(數理)에 정통했으며, 민간에서는 신선이 하계에 강림하여 태조를 보좌해 위업을 달성했다고 전해진다. 민간 이야기와 문학 작품 속에서 그는 늘 신기묘산(神機妙算)을 부리고, 미래를 예지(豫知)하며, 고금을 통찰할 뿐 아니라 바람과 비를 불러오고 신통이 매우 광대하여 "앞으론 오백 년, 뒤으론 오백 년을 안다"고 하여 신선과 같은 인물로 묘사된다.

비굴하게 아첨하다 (노안비슬)

송나라 흠종의 정강 2년(서기 1127년), 금나라 병사들이 남쪽으로 쳐들어와 마치 무인의 경지를 누비듯 하며 금방(오늘날의 허난성 개봉)을 신속히 함락시키고 휘종과 흠종 두 황제를 포로로 잡았다. 이를 역사적으로 '정강의 치욕(靖康之恥)'이라 한다. 이 사건 후, 흠종 조환의 동생 조구는 대신들의 도움을 받아 응천부(오늘날의 허난성 상구)에서 황제로 즉위하여 남송 왕조를 세웠다. 이후 수도를 임안(오늘날의 저장성 항저우)으로 옮기고 목숨을 부지하며 금나라가 제기하는 부당한 요구를 모두 수용했다. 송나라 이종 때에는 간신 가사도를 재상으로 임명하면서 조정의 정치가 더욱 혼란에 빠졌다.

대나무 통으로 하늘을 본다(以管窺天)

전국시대 제나라의 명의(名醫) 변약(扁鵲)은 본래 이름이 진월인(秦越人)이었다. 그는 죽음의 문턱에 있던 많은 사람들을 살렸기 때문에 당시 사람들은 그를 전설 속 황제 시대의 신의(神醫)인 '변약'이라 부르며, 그의 본명은 더 이상 언급하지 않았다. 전설에 따르면, 변약은 선약(仙藥)과 비방(秘方)을 얻어 벽을 사이에 두고도 환자를 치료할 수 있었으며, 환자의 오장육부를 뚜렷이 보고 병이 어디에 있는지 정확히 알 수 있었다.

눈 속에 숯을 전하다(雪中送炭)

송 태종(宋太宗)은 즉위 후 창업의 어려움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생활이 매우 검소했으며, 심지어 황궁 안에서 금은으로 장식하는 것도 금지했다. 또한 백성들의 고충을 충분히 이해하고, 항상 백성과 국가를 위하는 마음을 품고 있었다.어느 해 겨울, 날씨가 유난히 춥고, 마치 거위털 같은 큰 눈이 끊임없이 내렸다. 송 태종은 방 안에 있었지만 여전히 여우 가죽 외투를 입고도 온몸이 춥다고 느꼈고, 궁 밖은 더욱 극심한 한파였다. 태종은 불을 피워 놓은 화로를 가져오게 하고 뜨거운 술을 내오게 했다.

문과 골목문에 기대다 (倚門倚閭)

전국시대 제민왕(齊湣王) 때, 연(燕)과 진(秦) 등 여러 나라가 연합하여 제나라를 공격했다. 연나라 장수 악의(樂毅)가 군대를 이끌고 제나라 수도 임저(臨淄)에 침입했고, 제민왕은 위(衛)나라로 도망쳤다. 초(楚)나라는 대장 노치(淖齒)를 보내 군대를 이끌고 제나라를 돕겠다고 했지만, 사실은 진심으로 제나라를 구원하려는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노치는 제민왕을 살해하고 연나라와 함께 제나라의 땅과 보물을 나누어 가졌다. 마침내 전단(田單)이 연군을 크게 무찔러 비로소 제나라의 잃어버린 땅을 되찾을 수 있었다.

전쟁에는 간계가 늘어날수록 좋다(兵不厭詐)

한 안제(漢安帝) 재위 기간 동안, 양족(羌族) 부족들이 한나라 국경을 자주 침범했고, 어느 날은 한나라의 무도군(武都郡)을 포위하기까지 했다. 이에 한 안제는 급히 우서(虞詡)를 임명하여 양군(羌軍)과 맞서 싸우도록 했다. 우서는 부하들을 이끌고 밤새 무도군으로 급히 달려갔으나, 진창(陳倉), 효곡(崤谷) 일대에 도착했을 때 수많은 양군의 저지로 인해 전진하지 못했다.

삼사(三舍)를 물러나 피한다(退避三舍)

춘추 시대, 진(晉)나라에서 내란이 일어났다. 진헌공(晉獻公)은 시비(讒言)를 믿고 태자 신생(申生)을 죽이고, 신생의 동생 중이(重耳)를 체포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중이는 이 소식을 듣고 진나라를 탈출하여 10여 년간 방랑 생활을 하게 되었다. 그 기간 중, 중이는 한때 초(楚)나라에 머물렀는데, 초성왕(楚成王)은 중이가 장차 큰 업적을 이룰 인물이라 판단하고 국빈(國賓) 대우를 하며 상賓(上賓)처럼 대접했다.

권세에 아첨하고 세력에 기대다 (趨炎附勢)

이수(李垂)는 자가 순공(舜工)이며, 산동성 루오청(聊城) 사람으로, 북송(北宋)의 관리였다. 흥평(咸平) 연간에 과거에 급제하여 차례로 저작랑(著作郎), 관각교리(館閣校理) 등의 직책을 맡았다. 그는 세 권의 『도하형승서(導河形勝書)』를 편찬하여 옛 운하를 다스리는 데 유익한 많은 제안을 하였다. 그는 박학다식하고 정직하여 당시 관료 사회의 아첨과 비위 맞추기 같은 속된 풍조를 매우 혐오하였으며, 부패한 풍조에 동조하지 않아 많은 권력자들을 불쾌하게 만들어 오랫동안 중요한 자리에 등용되지 못하였다.

일諾천금

진나라 말기, 초지(楚地)에 계포(季布)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성정이 곧고 정의감이 강하며 남을 돕는 것을 좋아했다. 한번 약속한 일이라면 아무리 어려운 상황이라도 반드시 방법을 찾아서 해냈다. 그래서 모두에게 칭찬을 받았다. 초한지쟁(楚漢之爭) 당시, 계포는 항우(項羽)의 부하로, 여러 차례 책략을 세워 유방(劉邦)의 군대를 패배시킨 적이 있었다. 항우가 패배한 후, 계포는 홀로 중병을 뚫고 도망쳐 천애를 떠도는 생활을 시작했다. 황제가 된 유방은 이 일을 떠올릴 때마다 분노를 금치 못하고, 계포를 통촉하라는 명령을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