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주(西周) 선왕(宣王) 재위 기간, 조정에는 윤길보(尹吉甫)와 중산보(仲山甫)라는 두 명의 신하가 있었다. 이들은 주 선왕을 보좌하며 큰 공을 세웠다. 윤길보는 이름이 갑(甲)이고, '윤(尹)'은 관직명이다. 그는 북서쪽의 흠족(狁族)의 침공을 물리친 군사적 공로를 세웠으며, 성주(成周, 지금의 허난성 낙양 동쪽) 일대에서 남회이(南淮夷) 등 여러 부족의 조공을 거두는 임무도 수행한 바 있다. 중산보는 번(樊, 지금의 산시성 안남)에 봉해졌기 때문에 번중(樊仲), 번목중(樊穆仲)이라고도 불렸다.
전국시대 조나라에는 문무를 겸비한 두 능력 있는 신하가 있었다. 무신(武臣)은 냉파로, 용맹스럽고 전투에 능해 여러 차례 군대를 이끌고 제(齊), 위(魏) 등의 나라를 격파하며 제후들 사이에서 용맹함으로 이름을 떨쳤다. 문신(文臣)은 능상여로, 용기와 지략을 겸비하여 강대한 진왕(秦王) 앞에서도 위태로운 상황에서도 두려움을 느끼지 않았다. 그는 두 차례 진나라에 사신으로 파견되었는데, 첫 번째는 국보인 화씨벽을 무사히 조나라로 되돌려 '완벽귀조(完璧歸趙)'를 성사시켰고, 두 번째는 조왕을 따라 진왕의 '염지지회(澠池之會)'에 참석한 것이다.
조나라의 평원군은 전국시대 네 명문가 중 유명한 인물이었으며, 그의 막하에는 수천 명의 인재가 있었다고 전해진다. 모수 역시 그들 중 한 사람이다. 기원전 257년, 진나라 군대가 조나라 수도 한단을 포위하자, 조혜문왕은 평원군을 보내 초나라에 원군을 요청하게 했다. 그러나 초왕은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기 때문에, 평원군은 20명의 막하 인물을 데리고 갔다. 협상으로 합의를 이룰 수 있다면 가장 좋았고, 그렇지 않으면 무력을 동원해 초왕을 강제로 동의하게 하려는 계획이었다.
전국시대 말기, 초나라는 이미 성세에서 쇠락으로 접어들었다. 초상왕이 즉위한 후 날마다 향락에 빠져 정치를 돌보지 않을 뿐 아니라 간신 자란을 영윤(령윤)으로 임명하였다. 자란이 정권을 장악한 후 조정의 기강이 무너지고, 백성들은 물불 속에서 고통받고 있었다. 노신 장신은 초나라의 이러한 상황을 보고 마음 아파하며 잠도 먹지도 못할 지경이었다.
동한 말년, 조조는 중원을 통일하고 자신의 정치적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병사를 모으고 말을 사들이며, 풀과 곡식을 비축하고 온갖 방법을 다해 인재를 끌어들였다.조조의 손아귀에는 모계와 곽욱이라는 두 명의 모사가 있었다. 어느 날, 그들은 조조에게 두 가지 건의를 했다. 첫째, 황제의 이름을 빌려 천하를 통제하는 것으로, 이는 '천자를 끼고 제후를 명령한다(협천자이령제후)'는 전략이었다.
춘추시대, 초나라에 어백아(俞伯牙)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음률에 통달하고 거문고 연주 실력이 뛰어나 당시 유명한 거문고 연주가였다. 어백아는 어릴 때 총명하고 배우기를 좋아하여 고수를 스승으로 모시고 거문고 기술을 높은 수준까지 익혔으나, 늘 자신이 온갖 사물에 대한 감정을 신묘하게 표현하지 못한다고 느꼈다. 백아의 스승이 그의 마음을 알고는 그를 데리고 동해의 봉래도(蓬萊島)로 배를 타고 가, 자연의 경치를 감상하게 하고 바다 물결 소리를 들려주었다.
춘추시대에 제나라에는 관중과 포숙아라는 두 친한 친구가 있었다. 관중의 집은 매우 가난했고 어머니를 모셔야 했다. 포숙아가 이를 알고 관중을 찾아가 함께 장사를 하자고 했다. 돈을 벌고 나서 관중은 많은 몫을 받았고, 포숙아는 적은 몫만 받았다. 사람들은 하나둘씩 관중이 탐욕스럽고情의가 없다고 수군거렸다.
어느 날, 두 사람은 함께 밭에서 일을 하며 잡초를 매었다. 두 사람은 열심히 일을 하다 잠시도 쉬지 않고 금세 넓은 구역의 잡초를 제거했다.그때 관녕이 호미를 들어 내리치자 딱딱한 물건에 부딪혔다. 관녕은 이상하게 여겨 삽으로 뒤집은 큰 덩어리의 흙을 살펴보았다. 검은 흙 속에서 누르스름한 것이 반짝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