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를 위해 밥을 지고 부모를 부양하다 (負米養親)

자로(子路)는 춘추 시대 말기 노나라(魯國) 사람으로, 공자의 제자들 가운데 정치에 능했다고 유명한 인물이다. 공자의 총애를 받는 제자였으며, 성격이 직설적이고 용감하며, 특히 효성이 지극했다. 그러나 어릴 적 집안이 매우 가난하여 늘 조잡한 곡식과 들나물로 생활을 이어갔다. 어느 날, 늙은 부모님이 밥을 먹고 싶다고 하셨지만 집에는 쌀 한 톨도 없었다. 어떻게 해야 할까? 자로는 산을 몇 번 넘어서 친척 집에 가서 조금이라도 쌀을 빌리면 부모님의 소원을 이룰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于是 어린 자로는 산과 골짜기를 넘어 십여 리 길을 걸어 친척 집에서 작은 자루의 쌀을 지고 돌아왔다. 부모님이 향기로운 밥을 드시는 모습을 보고, 자로는 피로를 잊었다. 이웃 사람들은 모두 자로를 용감하고 효심 깊은 훌륭한 아이라고 칭찬했다.

사방지를 향한 큰 뜻

춘추 시대, 진헌공(晉獻公)은 애첩 여기(驪姬)의 부추김을 받아 태자 신생(申生)을 죽이고, 공자 중이(重耳)와 이오(夷吾)를 각각 적국(狄國)과 양국(梁國)으로 도망치게 했다. 이후 진헌공이 죽자, 이오는 진목공(秦穆公)과 제환공(齊桓公)의 도움을 받아 진나라의 군주가 되었다. 그는 중이가 돌아와 왕위를 빼앗길 것을 걱정하여 사람을 보내 중이를 죽이려 했다. 이에 중이는 다시 적국에서 온갖 고초를 겪으며 제나라로 도망쳤다.

백척간두

송나라 시기, 창사(長沙)에는 경침(景岑)이라는 고승이 있었는데, 호(號)는 소현대사(招賢大師)였다. 그는 불학(佛學)에 조예가 깊어, 늘 각지로 다니며 도를 전하고 경전을 강의했다. 대사의 강의는 깊이 있고도 이해하기 쉬우며, 생생하고 감동적이어서 청중들은 늘 깊이 감명을 받았다.

행동은 모든 성공의 근본이다

1977년, 황두두(黄豆豆)는 저장성 온저우(温州)의 외딴 산간 마을에서 태어났다. 그가 초등학교 2학년 때, 한 인민해방군 문공단이 그의 학교를 위문하며 공연을 했는데, 황두두는 그 순간 매료되었다. 그는 마음속으로 다짐했다. '나는 언젠가 무용가가 되리라.' 그 꿈을 향해, 12살 되던 해 황두두는 상하이 무용학교에 입학하여 민족무용을 배우기 시작했다. 황두두는 키가 매우 작았다. 그와 함께 입학한 열 명이 넘는 동기들은 모두 키도 크고 유연성도 그보다 훨씬 뛰어났다. 친구들은 그를 비웃으며 말했다. "너 같은 키로 춤을 평생 직업으로 삼겠다니? 꿈도 꾸지 마라, 힘만 낭비할 뿐이야!"

사랑의 선물

리시나의 집은 바다 가까이에 있었고, 마을 사람들은 대대로 어부로 살아왔다. 그는 어릴 때부터 아버지를 따라 바다에 나갔고, 어린 나이에 이미 아버지의 든든한 조수였다. 그런데 최근 들어 그는 제대로 된 일을 하지 않고 사냥에 빠져들었고, 거의无可구제(고칠 수 없을 정도)였다. 이 일로 인해 아버지에게 자주 꾸지람을 들었다. 마을에서 멀지 않은 곳에 험준하고 사람이 잘 가지 않는 작은 산이 있었다. 어른들은 그 산에 야생 멧돼지가 자주 출몰한다고 말했다. 만약 멧돼지를 잡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산에 사는 멧돼지는 그의 마음을 사로잡았고, 그는 운을 시험해보기로 결심했다.

미소는 자신에게 주는 최고의 선물이다

누군가 나에게燦爛한 미소를 지어줄 때마다 나는 기뻐진다. 왜냐하면 나는 그가 동시에 자신에게도 미소를 주고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렇다. 현실의 바쁜 삶 속에서, 왜 하루에 잠시 미소라도 자신에게 선물하지 않겠는가? 자신에게 미소를 선물하면, 자신의 상처를 닦아낼 수 있다. 인생의 여정 속에서 우리는 이런 자세를 가져야 한다. 실패와 좌절은 단지 기억일 뿐이며, 우리를 더욱 성숙하게 만들 뿐이다. 상처를 안은 채 자신에게 미소를 지어주는 것이야말로 인생의 또 하나의 빛나는 순간이다.

성공이란 최고의 나 자신이 되는 것이다

어린 시절 부모님이 이혼한 한 소년이 있었다. 그는 어머니와 함께 살았다. 경제적으로 넉넉하지 않아 가족 다섯 명이 바람이 사방에서 들어오는 나무판자로 지은 오두막에 빽빽이 들어찼고, '이층 침대'에서 잤으며, 간장에 비벼 먹는 밥을 천하의 최고 미식으로 여겼다. 그는 어릴 때부터 외모가 평범했고, 말이 적고 고립된 성격이었다. 친구들은 모두 그가 더럽고 못생겼다고 생각해 함께 노는 것을 꺼렸다. 학교에 다니기 시작한 후에는 친구들의 조롱과 모욕을 더욱 심하게 받았고, '아빠 없는 들개'라고 불리기도 했다. 그는 자신이 이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이라고 생각한 적도 있었다. 학생 시절 그는 매우 장난기 많고 활동적이고 게을렀으며, 성적도 항상 좋지 않았다. 그래서 학부모 회가 열릴 때마다 어머니는 반드시 불려갔다.

왕안석의 특별한 지혜

북송 경력 7년, 강남 지역은 끊임없이 비가 내렸다. 3월부터 9월까지 계속된 폭우로 논밭의 작물은颗粒无收(입에 넣을 곡식도 없을 정도로) 전멸했고, 피해를 본 현은 127개에 달했다. 쌀값은 연이어 오르기 시작했고, 10월이 되자 원래 석(石)당 400문이던 쌀값이 1500문까지 치솟았다. 백성들은 도저히 견딜 수 없는 고통 속에 빠졌다. 강남 각지의 관리들은 조정에 구호를 요청하면서 동시에 쌀값을 강력히 억제하고 투기상들을 단속했다. 쌀값을 올리는 자를 적발하면, 가벼운 경우는 재산 몰수와 함께 군대에 징용했고, 중한 경우는 현장에서 참수했다. 이런 천둥 같은 강경 수단 덕분에 강남 지역의 쌀값은 마침내 안정을 되찾아 석당 약 500문 선에서 유지되었다.

시라크의 두 장의 재산 목록

프랑스 전 대통령 자크 시라크는 세계 정치 무대에서 진정한 거물이라 할 수 있다. 다른 대통령들과 마찬가지로, 시라크가 재임 중일 때 많은 사람들이 그의 재산이 정확히 얼마인지 추측했으며, 특히 외국 기자들이 그러했다. 어떤 이들은 시라크의 재산이 최소한 천만 유로는 되어야 한다고 했고, 그러나 그것도 너무 적을 수 있으니 수천만 유로는 되어야 하며, 혹은 억 유로 단위일 것이라고도 했다. 이러한 것들은 모두 추측에 불과하지만, 추측에는 대체로 근거가 있는 법이다.所谓 "바람 없이 파도가 일지 않는다"는 말처럼 말이다. 시라크가 퇴임하기 2주 전이 되어서야 프랑스 관련 부서가 관례에 따라 시라크의 모든 재산을 공개했다. 여기에는 그와 제1부인이 공동으로 소유한 은행 예금을 포함하여 총 130만 유로가 포함됐다.

'기차의 아버지' 스티븐슨

1781년, 스티븐슨은 잉글랜드 북부 와일럼(Wylam)이라는 마을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석탄 광부였고, 어머니는 전업 주부였으며, 두 사람 다 글을 읽고 쓸 줄 몰랐다. 스티븐슨 역시 부모처럼 학교에 다닌 적이 없었고, 8세 때부터 남의 소를 데리고 다녔으며, 10세 때는 석탄 광산에서 잡일을 하기 시작했고, 14세 때는 아버지를 따라 광산에 들어가 일하기 시작했다. 가난하고 신분이 낮은 탓에 스티븐슨의 어린 시절은 조롱 속에서 보내졌지만, 그는 그런 놀림을 전혀 개의치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