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안석의 개혁

경력신정이 실패한 이후에도 북송의 사회 모순은 여전히 존재했다. 관료 지주들이 땅을 대량으로 병합하였고, 이들 중 일부는 병역 면제 특권을 누렸으며, 일부는 권력을 이용해 재산을 은닉하고 세금을 탈루하였다. 이로 인해 무거운 조세와 부역의 부담은 모두 농민들에게 전가되었다. 게다가 정부는 매년 요나라와 서하에 막대한 은과 비단을 지불해야 했는데, 이 역시 농민들이 부담해야 했다. 각지에서는 농민 봉기가 빈번히 발생하였고, 국가의 조세 수입은 불확실한 반면 지출은 점점 커져만 갔다. 북송 정부는 심각한 위기에 직면해 있었다.

주인 없는 배는 먹지 않다

남송 말기에 허형이라는 젊은이가 있었는데, 그는 총명하고 부지런하여 고장에서 꽤 이름이 알려져 있었다. 어느 날, 허형은 혼자 길을 떠났다. 때는 무더운 여름, 태양은 불덩이처럼 땅을 태우고 있었다. 허형은 장시간 길을 걸어 땀이 비 오듯 흐르고 목이 바싹 마를 지경이었다. 그렇게 걷던 중, 그는 큰 나무 아래에서 더위를 피하던 여러 상인들을 만났다. 이 상인들 역시 더위와 목마름에 시달리고 있었지만 물은 없었다.

정관지치(貞觀之治)

당태종은 당고조 이연(李淵)이 수립한 조상 숭배와 도가 존중이라는 국책을 계승하여 이를 더욱 발전시키고, 도가 사상을 활용하여 국가를 다스리고 천하를 안정시켰다. 당태종은 인재를 청렴하고 유능한 사람을 기준으로 등용하며, 사람을 잘 알고 적재적소에 활용하였다. 또한 의견을 폭넓게 수렴하고, 생명을 존중하며, 자기 통제를 실천하고, 겸허하게 간쟁을 받아들였다. 농업을 중시하고, 절약을 철저히 하며, 백성으로 하여금 휴식과 생업에 전념하게 하고, 문화와 교육을 부흥시키며, 과거 제도를 완비하는 등의 정책을 시행하여 사회에 안정된 국면을 만들었다. 또한 외세의 침략을 적극적으로 평정하고, 변방 민족들의 풍속을 존중하며, 국경을 공고히 하여 마침내 천하가 크게 다스려지는 이상적인 국면을 성취하였다. 당시 연호가 '정관'(貞觀, 627년-649년)이었기 때문에, 역사적으로 '정관지치'라 불린다.

땅을 파서 어머니를 만나다

『좌전(左傳)·은공원년(隱公元年)』에 기록되어 있다. 정장공(鄭莊公)에게는 형제가 둘이 있었는데, 어머니 무강(武姜)이 장공을 낳을 때 난산을 겪었기 때문에 그를 싫어하게 되었고, 그래서 그를 '오생(寤生)'이라 이름 지었다. 반면에 동생 숭단(叔段)에게는 온갖 사랑을 쏟아 부었다. 옛 제도에 따라 맏아들인 오생은 당연히 왕위를 계승하여 정나라의 군주가 되었다. 그러나 어머니 무강은 더욱 불만을 품고, 숭단의 세력을 키워 장공을 대체하게 하려고 온갖 노력을 다했다. 그리하여 그녀는 먼저 숭단을 위해 제읍(制邑, 지금의 정저우 상제)을 봉지로 달라고 장공에게 청했지만, 장공이 거절했다. 이에 무강은 다시 장공에게 숭단을 경상성(京襄城, 지금의 영양)에 봉해달라고 요청했고, 장공은 이를 승낙했다.

상인의 강 건너기

현대인의 눈으로 보면 '상(商)'과 '고(賈)'는 의미상 큰 차이가 없으며 둘 다 무역을 의미한다. 그러나 옛날에는 '상'과 '고'가 영업 방식에서 차이가 있었다. 소량으로 파는 것을 '상'이라 하고, 돌아다니며 파는 것을 '고'라고 했다. 한 곳에서 물건을 사들여 다른 곳에서 파는 방식으로 장사를 하는 사람을 '고인(賈人)'이라 했다.

자산이 물고기를 풀어준 일

어느 날, 한 친구가 자산에게 살아 있는 물고기 몇 마리를 선물로 주었다. 물고기들은 살이 통통하게 올라 있어 요리를 하면 분명 맛있는 음식이 될 것이었다. 자산은 친구의 정성에 깊이 감사하며 기쁘게 선물을 받은 후 하인에게 지시했다. "이 물고기들을 마당 안 연못에 풀어줘라.

한 글자로 위조를 밝히다

청나라 건륭 17년의 일이다. 어느 날 아침, 서른 살이 조금 넘은 한 사내가 광서성 창우현 아문의 정당으로 뛰어들어 양 무릎을 꿇고 원통함을 호소하며 고소장을 들어 올렸다. 현령 이문정은 당하에 고소하는 자를 보고 경당목을 탁 치며 말했다. "누구를 고소하는 것이냐? 천천히 말해 보아라."

양소청풍

우겸(于謙), 자는 정익(廷益)으로 명나라의 명신이다. 그는 수도로 전임되기 전까지 줄곧 지방관으로 일했다. 그는 벼슬살이를 청렴하게 하였고, 부하 관리들에 대해서도 매우 엄격한 기준을 요구하며 뇌물 수수와 횡령을 단호히 금지하였으며, 무엇보다 자신이 몸소 실천하였다.

남의 그늘에 의지하다

장융(張融)은 남조(南朝) 사람으로 외모는 뛰어나지 않았지만, 재능과 지혜가 뛰어나 시문(詩文)과 서화(書畫)에 모두 정통했으며, 특히 광초체(狂草體)에 뛰어났다. 그의 작품은 틀에 얽매이지 않고 독창적인 스타일을 지녔다. 그는 성품이 고고하고 세속을 초월하여 진정한 실력과 통찰력을 가진 사람과만 교제했으며, 그렇지 않으면 왕공귀족이라도 눈에 두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