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으른 수탉

아주 오래전 어느 해, 극심한 가뭄이 들었다. 숲속의 작은 시내는 마르고, 샘물은 말라 버렸다. 동물들은 마실 물을 찾을 수 없어 매우 고통스러웠다.어느 날, 곰돌이, 토끼, 사자 새끼 등 여러 동물들이 커다란 나무 아래 모여 어떻게 물을 구할지 의논하고 있었다. 그때 갑자기 큰 나무가 입을 열었다. "얘들아, 내 뿌리 밑에 우물을 파면 물이 나올 거야."

이가 없는 소녀

할머니가 거리에서 돌아오자마자 문을 열고 소리쳤다. "얘들아, 너희들을 위한 좋은 걸 사 왔어!""무슨 좋은 거야? 맛있는 거야?" 삼색 고양이, 삼색 강아지, 흰 토끼가 달려와 물었다."봐봐!" 할머니는 칫솔 세 개를 들고 말했다. "오늘부터 너희들은 모두 이것으로 이를 닦아야 해!"

성포 전투

속담에 "먼저 손 쓰는 자가 유리하고, 나중에 움직이는 자는 화를 입는다"고 했다. 군사상 '선발제인(先發制人)'은 중요한 명제이다. 이미 『좌전』에는 "선수를 치면 적의 의지를 꺾을 수 있다"는 말이 있으며, 후세에도 "병사는 먼저 행동하는 것이 귀하다", "내가 먼저 적을 공격할지언정, 적에게 먼저 공격당하지 말라"는 주장들이 많았는데, 모두 작전에서 선제권을 잡으려는 뜻이다. 그러나 모든 일이 절대적인 것은 아니다. 특정한 조건 하에서는 '후발제인(後發制人)'도 군사적 투쟁의 중요한 수단이며, '선발제인'과 변증법적인 통일을 이룬다.

한신의 강을 등지고 진을 치다

기원전 204년 가을, 어느 깊은 밤, 한신의 수만 명의 군대가 하베이성 징싱커우(정형구)에서 수십 리 떨어진 산골짜기에 도착하여 진을 쳤다. 그들은 삼 일 삼야의 급행군을 마치고야 비로소 이곳에 도착한 터였다.장병들이 잠시 휴식을 취하는 틈을 타, 한신은 부장 장이를 곁으로 불러 함께 조나라를 무찌를 계책을 상의했다.이 작전은 한신이 류방에게 제안한 전략 계획의 일환이었다. 북쪽으로 대(代), 조(趙), 연(燕)을 정벌하고, 동쪽으로 제(齊)를 공격하며, 남쪽으로 초(楚)군의 양식 공급선을 끊은 후, 항우(項羽)를 후방에서 포위하는 것이었다.

손무, 초나라를 공격하여 전쟁 없이 승리하다

기원전 506년, 오자서의 추천으로 오 왕 합려는 위대한 군사 전략가 손무를 장군으로 임명하고 병사들을 정비하여 초나라 공격을 준비했다.손무는 제나라 사람으로, 스스로 동해가의 작은 농부라 칭하며, 오나라 대부 오자서의 초청을 받아 남쪽 오나라로 내려온 인물이었다. 그의 관심사는 병법 연구였고, 명예와 이익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 이번에 지위가 높은 장군직을 수락한 데는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 첫째로는 오래된 친구 오자서를 도와 초나라를 무찌르는 것이었다.

정경 전투

기원전 206년, 일시적으로 강성했던 진 제국이 멸망한 후 중국 역사가 새로운 단계로 접어들었다. 당시 서초의 패왕 항우와 한왕 유방은 각각 새로운 세력을 형성하여 천하를 놓고 다투기 시작하였고, 역사적으로 유명한 초한쟁패가 벌어졌다. 이 약 5년간 지속된 전쟁에서 한나라의 대장 한신은 "영채 안에서 전략을 세우고 백만 대군을 지휘하며, 싸우면 반드시 승리하고 공격하면 반드시 점령한다"는 뛰어난 지략과 병법 전략을 보여주었다.

부평 전투

1130년(금 천회 8년, 남송 건염 4년) 9월, 금군이 산시(陝西) 지역을 점령하기 위해 부평(지금의 산시성 부평 북부) 지역에서 송군의 반격을 격퇴한 전투이다.천회 8년(1130년) 7월, 금 태종 완안성(完顏晟)은 완안종벽(完顏宗弼)이 강남으로 남하했다가 실패하고, 완안누실(完顏婁室)이 산시에서의 공격이 좌절된 것을 보고, 좌부원수 완안종한(完顏宗翰)의 건의를 받아들여 송나라 공격의 주요 방향을 강남 절강 지역에서 산시 지역으로 전환하기로 결정하였다.

진조 상당 전투

상당은 '천하의 등줄기'라 불리며, "중주(中原)를 내려다보고, 하동과 병주를 팔꿈치처럼 지지하고 있으므로 진(晉)나라의 목咽喉라 일컬을 만하다"고 할 정도로 형세가 매우 요충지였다. 그래서 옛날부터 병가가 반드시 다투는 전략적 요지였다. 기원전 402년, 위(魏)·조(趙)·한(韓) 삼가가 진(晉)나라를 나누어 가졌을 때, 상당은 한나라에 속하게 되었다. 그러나 세력이 강해진 진나라는 상당을 오래전부터 노리고 있었다. 기원전 280년, 진나라의 장수 백기(白起)가 상당 깊숙이 침입해 광랑성(光狼城, 지금의 고평(高平) 강영촌(康營村))을 함락시킨 바 있다.

투무보 전투

명태조가 재위할 당시, 역사상 환관들의 전횡이 국가를 혼란에 빠뜨린 교훈을 얻어, 환관이 국가 정사를 간섭하지 못하게 하는 규정을 세웠다. 그는 이 규정을 커다란 철제 패판에 새겨 궁전에 걸어두고, 자손 대대로 이를 준수하기를 바랐다. 그러나 명성조 때에 이 규정은 폐지되고 말았다.

상양 남문에 나무 기둥을 세우다

전국 7웅 사이에서, 진나라는 정치·경제·문화 전반에 걸쳐 중원 제후국들보다 뒤떨어져 있었다. 인접한 위나라가 진나라보다 강해, 하서(河西)의 광대한 지역까지 빼앗아갔다.기원전 361년, 진나라의 새로운 군주인 진효공이 즉위했다. 그는 분발하여 나라를 부강하게 만들 결심을 하고, 우선 인재를 모았다. 그는 명령을 내려 말하기를, "진나라 사람이든 외부 사람(객사)이든, 누구든지 진나라를 부강하게 할 방도를 마련할 수 있다면 벼슬을 주겠다"고 하였다.